Monday, November 2, 2015

Alexandros the Great 알렉산더 대왕, 혹은 알렉산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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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3세(그리스어 : Ἀλέξανδρος Γ' , 영어 : Alexandros the Great, 기원전 356년 7월 20 일 - 기원전 323년 6월 10일 , 재위 기원전 336년 - 기원전 323년), 통칭 알렉산더 대왕(그리스어 : Ἀλέξανδρος ὁ Μέγας)은, 아루게아스 주 마케도니아 왕국의 바시레우스겸 코린토스 동맹(헬라스 동맹)의 맹주, 이집트의 파라오였다. 912년 5월부터 913년 6월 6일까지 13개월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였다.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우스가 선조라고 해서, 그리스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로스(Αλέξανδρος.'지킴'이라는 뜻의 'αλέξ'와 '남자'라는 뜻을 가진 낱말의 소유격 'ανδρος'의 합성어)지만, 영어식으로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다. 한니발, 율리우스 카이사르, 나폴레옹 등 역사적 인물들에게 영웅으로 존경 받았다. 구약성경과 코란 , 샤나메 ,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민족의 성경에도 등장한다.



 Alexander III (356-323 BC) the Great before the Tomb of Achilles


왕위에 오르다

알렉산더 3세는 필리포스 2세와 에페이로스의 공주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필리포스 2세는 헤라클레스를 선조로 하는 가계, 올림피아스는 아킬우레스을 선조로 하는 가문이라서, 그리스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두 영웅의 혈통을 가졌다고 한다.

기원전 342년 , 필리포스는 아테네에서 마케도니아인 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를 교사로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시 페라에서 떨어진 미에자 학원에서 기원전 340년까지 알렉산더와 그 동창을 가르쳤다. 알렉산더는 "필리포스 2세에게서 생명을 받았지만, 고귀하게 사는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했다. 또한 그와 함께 그리스 의 기초적인 교양을 몸에 익히고 동창들은 나중에 알렉산드로스를 지원하는 장군이 됐다.

Entrée d'Alexandre le Grand dans Babylone ou Le triomphe d'Alexandre 


필리포스 2세와는 사이가 나빴다. 필리포스의 후처인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인 아툴루스가 "이 결합으로 마케도니아에 좋은 후계자가 탄생하기를 바란다"고 하자 알렉산드로스가 "너는 내가 보이지 않는가"하며 술잔을 던졌다.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를 추방했다고 한다. 때문에 알렉산드로스가 필리포스를 암살했다는 설이 있다.

그는 왕위에 올라 왕위 계승을 다툰 왕자들을 전부 죽였다. 아툴루스도 처형 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아들을 제외한 전부가 처형 당했는데, 아들이 용서받은 이유는 올림피아스가 독을 먹여서 미치광이가 됐기 때문이라고. 또 올림피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딸을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상의 없이 일을 저질렀다고 화를 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리스 전체의 반란에 직면하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측근들은 모두 외교로 해결하라고 조언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기병 3,000명만 이끌고 남하한다. 마케도니아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폴리스인 테살리아가 먼저 제압당했고, 테살리아의 병력을 인수한 알렉산드로스가 남하하자 모든 그리스의 도시들이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했다.

1년 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하기 전에 북쪽 국경을 안전하게 해두고 싶었는지, 지금의 이스탄불 북서쪽에 위치한 트라키아인들을 공격하여 제압하고 도나우 강까지 올라가 그 곳에 위치하고 있던 게타이(훗날의 다키아) 부족을 격파한다. 그 때 일리리아(그리스의 서쪽, 이탈리아와 아드리안 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렉산드로스는 즉각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모두 진압한다. 그 때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헛소문이 그리스에 퍼졌고, 테베가 반란을 선동하고 여기에 편승해 아테네도 반란에 참여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를 점령하고 도시를 파괴했으며,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서 아테네와 쌍벽의 강력한 도시 테베는 멸망했다. 다만 시인 핀타로스의 집은 부하들에게 파괴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아테네는 테베의 멸망을 보고 항복했다.

정복

알렉산더 3세는 기원전 334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마케도니아군 38,000명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가기 위해 소아시아로 갔는데 그 곳에서 태수의 연합군 40,000명과 대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 선두에 서서 말을 몰며 돌진해 적장 미토리다테스를 사로잡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아군 장병의 신뢰를 얻고 적에게는 공포를 준다. 마케도니아군은 소아시아에 주둔하는 페르시안 군대를 물리치며 동쪽으로 진격한다.

동방을 정벌하러 가던 중, 알렉산드로스의 요청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군주론>과 <식민지론>을 썼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도 각국에서 동물과 식물을 보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을 관찰하며 연구를 계속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교류는 이렇게 알렉산드로스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Battle of Issus(Albrecht Altdorfer, 1480~1538) 


기원전 333년, 마침내 알렉산더는 안티오크 북서쪽 이수스에서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 100,000명과 조우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과 호위병, 징집병을 종횡무진 지휘하고 페르시아군을 이겨서, 다리우스의 어머니와 아내, 딸을 포로로 잡았다. 이 때 페르시아가 화목을 제안하지만 거절하고 계속 진군하고 시리아에서 남하해 이집트에 침입했다.

다리우스 3세가 제의한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땅을 몽땅 양보한다는 것에 자신의 가족의 몸값으로 1만 탈렌트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대략 3천억원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아시아의 왕이므로 영토 분할은 자신의 권한이라고 답한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파르메니온이 '내가 알렉산드로스 왕이라면 이 강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파르메니온이었으면 그랬겠지'라고 대답했다.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왕비가 이수스 전투로 포로가 됐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존중했다.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도량을 칭찬하며, 만약 자신이 왕국을 잃으면 알렉산드로스가 왕이 되도록 신에게 기도했다.

이집트는 이 시점에서 11년 전인 기원전 343년에 아닥사스다 3세에게 정복됐고 페르시아의 통치가 뿌리 내리지 않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기원전 332년, 이집트에게 해방자로 영입된 알렉산더는 파라오로 인정받아 신상이 아문 신전에 만들어졌다. 그는 소수 부대를 이끌고 서부 사막의 아문 성지로 가서, 여기에서 스스로를 아몬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탁을 받았다. 아몬은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동일시되며,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신탁이나 다름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크게 만족해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것을 기념하는 동전도 발행했는데, 이 동전에는 알렉산드로스의 두상에 아몬 신의 상징인 숫양의 뿔이 달린 모습을 새겼다. 또한 그는 나일 델타 서쪽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가 현재 알렉산드리아의 기원이다.

이집트에서 장병에게 충분한 보급과 휴식을 준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왕국으로 원정을 재개한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군단은 47,000명은 티그리스 강 상류의 가우가멜라에서 20만에서 30만으로 추정되는 다리우스 3세 휘하의 페르시아 군단을 물리치고, 다리우스는 카스피해 동쪽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되자 페르시아 왕국은 풍전등화가 됐다. 페르시아 왕국 중추에 난입한 마케도니아 군단은 바빌론과 주요 도시를 약탈했고, 페르세폴리스는 민간인도 학살하고 철저하게 도시를 파괴했다. 페르세폴리스의 파괴는 페르시아 전쟁 때 페르시안이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도 있다. 페르시아 중추를 점령하고 나서 알렉산더 군단은 다리우스를 쫓아 진격했다.

이듬해 다리우스 3세가 왕족 측근이었던 베소스에게 암살되자,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다리우스가 죽은 뒤에도 베소스는 페르시아 국왕을 자칭하며 항전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베소스의 불충을 규탄하고 베소스를 잡아 공개 처형했다.

중앙 아시아 방면으로 침공한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반란을 일으킨 스피타메네스를 중심으로 한 소그드디아나인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마케도니아 군대는 기원전 329년부터 기원전 327년까지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의 거친 게릴라 전투( Siege of the Sogdian Rock)를 강요 당해, 장병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호전적인 유목민인 스키타이이 공격했지만, 알렉산드로스와 그 부하인 쿠라테로스는 유목민 기병에게도 승리했다.

유목민 왕이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은 무엇이든 들을테니 용서해 주시오"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크레토스 살해 사건과 근습에 의한 음모 사건 등 알렉산더와 부하들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8년에 귀순한 이 지방의 유력자, 옥시아르테스의 딸 록사네(Roxane)를 왕비로 삼았다.

The Battle of Alexander at Issus(Albrecht Altdorfer, 1480~1538)


페르시아 왕국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로 원정을 떠났다. 스와토 계곡에서 코휀 전쟁, 아오루노스 공성전, 기원전 326년에 인더스 강을 넘어 펀자브 지방에 침입해 5월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파우라바 족의 왕 포로스에게 승리했다. 그 후에도 주변의 제부족을 평정하면서 진군해, 인도에서 가장 용맹하다는 카타이오이들도 제압했다.

11월부터 알렉산드로스는 Hydraotes 강을 남하해서, 전군을 3개로 분할하고 쿠라테로스와 함께 잔존하는 적대 세력을 내쫓았다. 그리고 인더스 강을 남하해 Patala로 갔다. 게도로시아 사막을 통해 카루마니아에 가서 기원전 324년에 스사(Susa)에 귀환했다. 이 때, 부하의 네아르코스에게 인더스에서 페르시아만을 통해 유프라테스 강 하구까지 항해할 것을 명령했다. 이 탐험 항해에 의해 이 지역의 지리가 밝혀졌고, 네아르코스가 남긴 자료는 소실됐지만 스트라본 등에게 인용된 귀중한 기록이 있다.

동방 원정 중 술에 독이 들어 있었는데, 알렉산더가 이것을 알아채고 젊은 장교들에 의한 알렉산드로스 암살 계획이 발각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설명이 모두 다르다. 주동자로 사령관 중 한명인 휘로타스의 이름이 거론된다. 휘로타스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그의 의형제들이 고문 끝에 자백해서 유죄 판결이 나 처형됐다.

영향

Alexandre le Grand faisant porter à Aristote divers animaux étrangersafin qu’il écrive son Histoire naturelle - Jean-Baptiste de Champaigne


Diogène visité par Alexandre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는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그 후계 왕조에 뿌리내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 빈사의 갈리아인 등의 조각이 만들어졌다. 에우클레이데스, 아폴로, 아르키메데스, 에라토스테네스, 아리스타쿠스 등의 학자들도 배출하고 고대 로마에 강한 영향을 미쳐 사산 제국에도 영향을 줬다.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마케도니아인은 고난을 견디는숙달된 좋은 군인이었다. 또 알렉산드로스는 상황에 따라 다른 혼성 부대를 편성해서 다양한 스타일의 적에게 유연하게 대응했다. 예를 들어, 유목민 스키타이와의 전투에서 적의 hit and away 전법에 투창 기병대와 경장 보병의 혼성 부대를 이용해 승리했다. 유능한 전술가인 알렉산드로스의 휘하였던 마케도니아 군대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전술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는 전사로도 유능했다. 알렉산드로스 스스로 행군 중에 있어도 짐마차에 승하차하고 몸을 단련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항상 최전선에서 장병과 함께 싸우고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 중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고대 그리스에서 사령관은 뒤에 안전한 장소에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싸우는 관습이 있어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장에서 위기를 넘겨 신의 보호를 받는 전사라고, 장병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급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제국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크리스(코린토스 동맹) 3지역으로 재편하고 알렉산드로스에 의한 동군 연합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페르시안을 적극 등용하는 등, 페르시안과 마케도니아인의 융화를 도모했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 후계자를 선포했는데, 페르시아 왕의 의복을 입고 페르시아 풍의 의례와 통치를 도입해서 마케도니아인의 반발을 샀다.

바빌론에 돌아온 알렉산더는 아라비아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해군 제독이었던 네아르코스와의 파티로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신 뒤 몸에 열이 나기 시작, 고열이 계속된다. 일주일 뒤 그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다음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틀 뒤인 기원전 323년 6월 10일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0일 동안 고열에 시달리다 "강한 자가 제국을 상속하라"고 유언하고 죽었다고 하지만 말을 못하던 사람이 어떻게 유언을 남겼는지 의문. 이것은 후대가 덧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남겨진 대제국은 그의 유장들이 바빌론 회의, 트리파라디소스의 군회 이 두번의 협정으로 안정화하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유언에 충실하게 패권을 다투게 되고, 안티고노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다른 여러 장군에 의한 디아도코이 전쟁을 거쳐 분열했다. 기원전 3세기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헬레니즘 세개의 왕국이 출현, 그들은 서로 싸웠지만 이 3국 정립이 자리잡게 됐다.

그 후 기원전 168년에 안티고노스 왕조가 멸망한 것을 시작으로, 서쪽은 순차적으로 로마에 병합되고 헬레니즘 제3국은 전부 로마가 멸망시켰다. 동방은 파르티아가 발흥해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 대부분을 빼앗고, 동방 령은 마케도니아인의 손을 떠났다. 이후 동부 지중해에서 중앙 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은 이슬람 제국의 출현까지​다시 큰 통일을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은 페루디카스가 바빌론에서 왕도 페라로 이송하던 도중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강탈돼, 미라로 이집트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일족은 디아도코이 전쟁 중에 살해당해 알렉산드로스의 혈통은 단절됐다.

일화

알렉산더 대왕이 리디아의 수도 골디온을 점령했을 때(기원전 333년) 마을의 중심에 있는 제우스 신전에 하나의 오래된 전차가 있었다. 그 전차는 '고르 디오스의 매듭'이라고 불리는 얽힌 줄이 있었다. 그 곳에는 <이 매듭을 푼 자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 전설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검으로 매듭을 절단하고 "운명은 전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검에 의해 개척하는 것"이라고 병사들에게 선언했다.
코린토스에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언제나 알몸으로 거닐고 있었는데, 본인은 그런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어느 날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디오게네스를 찾아 온 알렉산드로스는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대답은 "그늘이 지니까 거기에서 비켜달라'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만약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Alexandre coupe le noeud gordien

알렉산드로스는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좋아했다. 동방 원정에서 소아시아로 건너갈 때 멀리 떨어져 있는 트로이에 일부러 가서, 아킬레우스의 무덤에 화환을 바쳤다. 또, 거기에 있던 아테나 신전에 자신의 무기들을 봉납하고 대신 트로이 전쟁 때부터 전해지는 갑옷을 받았다고 한다. 트로이에서 받은 거룩한 방패를 항상 갖고 다니며 전투시에는 그것을 부하에게 들게 하고 자신 앞에서 전진하도록 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믿었다. 인도 북부를 침공했을 때 헤라클레스도 정복하지 못했다는 난공불락 아오루노스라는 바위 산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알렉산드로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뜬 소문이며, 현지에 그런 전승은 없다고.

"만약 그가 신이 되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그냥 신이라고 불러줄 수 밖에"
알렉산드로스가 도시 국가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대우하라고 명령했을 때 스파르타인 Damis가 한 말.

알렉산더 대왕은 양성애자였다. 친구인 헤파이스티온(Hephaistion)이 애인이었다. 그가 죽자 병을 낫게하지 못한 의사를 죽였다는 말이 있다. 또 페르시아 출신 환관 바고아스와의 염문도 있다.

Apelle et Campaspe

Alexandre le Grand cédant Campaspe à Apelle

알렉산드로스는  화가 아펠레스에게 첩 캄파스페를 모델로 미의 여신을 그리게 했다. 아펠레스와 캄파스페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들의 밀회를 목격한 알렉산드로스는 "칼의 제왕이 붓의 제왕에게 졌다"며 캄파스페를 양보한다.

아랍과 페르시아에서는 이스칸달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알렉산더 3세의 용맹은 이슬람 세계에 일종의 영웅 전설로 전해진다. 중동 전승에서는 알렉산드로스에게 2개의 뿔이 있다고 하며(앞서 언급한 동전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남아시아에 이스칸달라는 남성 이름이 있는 것은 이슬람교가 동진해서 이 영웅 전설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Sunday, November 1, 2015

Third Servile War(War of Spartacus)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시작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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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투사 양성소에서 탈출
기원전 1세기 공화정 로마에서 검투사 경기는 인기 있었다. 경기에 나가는 검투사를 공급하려고 많은 검투사 양성소가 만들어졌다. 이 양성소에서는 전쟁 포로나 노예 시장에서 매매된 사람이나 지원한 자유 시민이 검투사가 돼서 싸움 기술을 배웠다. 강한 검투사는 부와 명예를 얻었고, laniste가 될 수 있었다. 경기에 패배한다고 해서 반드시 죽지는 않았지만, 계속되는 경기에서 살아남아 자유 시민이 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인 검투 노예로, 캄파니아 지방 카푸아의 그네우스 콘넬리우스 렌툴루스 바티아누스(Gnaeus Cornelius Lentulus Batiatus)가 소유한 검투사 양성소에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트라키아의 마이도이족 출신이라고 서술했으며, 아피아노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원래 로마 군단의 보조병이었지만, 포로가 돼서 팔려 검투사가 된 트라키아인이라고 전했다. 플로루스는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메디족 출신. 미토리다테스 전쟁에서 폰토스 왕국 용병으로 참전. 메디족이 로마와 강화(講和)해서 나중에는 로마 병사가 됐지만, 반로마 투쟁을 벌였다. 후에 로마군 포로가 돼서 노예로 팔려가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로 갔다>고 서술. 테오도어 몸젠(Theodor Mommsen)은 보스포러스 왕국 트라키아계 왕가 후손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또 사료가 말하는 트라키아는 민족이 아니라 검투사 스타일 -트라키아 검투사라는 타입이 있다- 이 아닌가 하는 이론도 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남쪽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은 검투사가 번성 한 곳이며, 가장 오래된 검투사 양성소는 카푸아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기원전 73년 검투 노예 200명이 탈주를 계획했다. 밀고에 의해 계획이 새나가자 약 70명의 노예가 주방 조리 도구를 무기로 양성소를 탈출하고, 지나가던 여러 대의 마차에서 검투사의 무기와 갑옷도 손에 넣었다. 도망쳐 자유로워진 검투사들은 스파르타쿠스와 갈리아인 2명, 크릭서스와 오에노마우스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도망친 노예들은 카푸아에서 파견된 토벌대를 격퇴하고, 군대의 무기를 가졌다. 양성소에서 탈출한 직후의 동향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다르지만, 도망친 검투사 집단이 카푸아 주변을 약탈하고 그 곳의 노예들을 동료로 만들어 베스비우스 화산에 갔다는 점은 대체로 일치한다.
2. 잇따른 승리​
봉기와 습격이 일어난 캄파니아는 로마의 자산가나 유력자의 휴양지며, 여기에는 많은 별장이 있어 금방 로마 정부가 반란을 주시했다. 당초 이 반란은 무장 봉기가 아니라 대규모 치안 악화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 해 하반기에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법무관이 이끄는 토벌군을 파견.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자갈은 병사 3,000명을 모았지만, 이것은 군단병이 아니라 민병대며, 로마인들은 이것을 전쟁이 아니라 도적의 습격으로 간주. 자갈의 병사는 베스비우스산의 노예 군을 포위하고 산으로 통하는 유일한 도로를 폐쇄했다. 노예군을 갇히가뒀다고 생각한 자갈은 굶주림에 시달리던 노예들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노예들은 군사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스파르타쿠스의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자재를 활용해 로마군에 맞섰다. 자갈의 포위 작전에 스파르타쿠스의 부하들은 베스비우스산 중턱에 자라던 덩굴과 나무를 이용해서, 줄이나 사다리를 만들어 자갈군의 배후 절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배스비우스 산기슭을 돌아, 자갈군의 배후를 파고들어 그들을 섬멸했다.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Publius Varinius)가 이끄는 2번째 토벌군이 스파르타쿠스에 보내졌다. 와리니우스 군대는 부하인 프리우스와 코시니우스 부대로 나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프리우스 병사를 3,000명이라고 규정했지만, 부대의 병력, 토벌군이 정규 군단병인지 민병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토벌군도 노예 군대에게 격파돼서, 코시니우스는 전사하고 와리니우스는 노예들을 놓쳤으며, 장비도 빼앗겼다.
이 승리로 그 지방의 목인 노예를 포함한 많은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 군대에 참집, 노예군은 약 70,000명까지 치솟았다. 반란 노예는 기원전 73년에서 72년 사이 겨울을 신병들의 훈련과 무장화에 투자해서 습격 범위를 넓혔다.
노예측도 손실을 입었다. 반란 초기에 지도자중 한명이었던 오에노마우스도 전사했는지 그의 이름은 여러 사료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3. 늘어난 반란군

The Death of Spartacus by Hermann Vogel (1882)

반란군의 규모는 사료에 따라 다르지만, 전성기에는 120,000명에서 200,000명,최종 국면는 300,000명 이상이었다고 추정한다. 그 구성은 고전 사료에서 검투사, 목자 노예, 탈주 노예, 수공업 노예 이외에 경작지 자유 시민(빈농), 삼니움의 하층민, 그리고 로마 군단 도망자도 있었다고 한다. 이 중 농노가 대부분이었다고 추정되며, 스파르타쿠스는 뒤늦게 로마 군단에서 도망자의 수용을 멈춘다. 민족으로는 게르만인, 켈트인(갈리아인), 스코루디스키 , 트라키아인 그리고 이탈리아(자유인이나 노예)가 존재했지만 로마인의 노예였던 그리스, 시리아 동방 노예, 히스파니아, 아프리카 출신 노예는 고전 사료에 언급이 없다.

아피아노스는의 반란군 군기가 엄격했다고 전한다. 스파르타쿠스는 약탈품을 평등하게 분배했고, 금의 개인 소유를 금지했다고. 불필요한 폭행과 약탈 등 일탈 행위도 금지했다고 한다.
반란군의 목적에 대해 아피아노스는 로마 진군에 있었다고 서술했으나, 이것은 당시 로마 시민의 공포를 반영했다는 해석이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갈리아 키사르피나까지 북상해서​그의 동료들을 고향으로 돌려주고 싶어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몸젠을 비롯한 근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자유를 얻으려하는 스파르타쿠스파와 남부 이탈리아에 머물며 약탈을 계속하려고 하는 크릭수스파와 도망 노예들이 분열했다고 말한다. 플루타르코스도 도망 노예의 일부가 알프스를 넘어 탈출하는 것보다 이탈리아를 약탈할 것을 바랐다고 말한다. 분열이 발생했다고 언급하는 고전 사료는 없다.
 4. 집권 관군의 패배
로마는 서방의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 기원전 72년 죽음)의 반란이 기원전 77 년부터 계속됐으며, 기원전 73년에는 동방의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재개했다( 제3차 미토리다테스 전쟁 ). 동부 지중해에서는 크레타 해적이 날뛰었고 로마의 보급로를 위협했는데, 이런 위기에 이탈리아 본토에서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발발한 것이다.​
​기원전 72 년, 도망찬 노예들은 동영 지역을 떠나 갈리아 키사르피나로북상했다.
반란군의 규모와 자갈 및 와리니우스 두 법무관의 패배에 위기를 느낀 원로원은 그해 집정관이었던 코르넬리우스 렌툴스 클라디아누스와 루키우스 게리우스 푸브리골라가 이끄는 로마군을 파견했다. 게리우스 군단은 가르가누스 산록에서 크릭수스가 지휘한 반란군 30,000명과 싸웠다. 게리우스가 크게 승리하고, 크릭수스를 포함한 반란병의 2/3가 죽었다 . 이 싸움은 훗날 카이사르의 정적이 될 젊은 소 카토(Marcus Porcius Cato Uticensis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기원전 95년 ~ 기원전 46년. 소 카토라고 불리는 이유는, 같은 이름을 가진 대 카토의 증손자기 때문)도 종군해서 활약했다. 게리우스는 소 카토에게도 보상을 주려고 했지만, 그는 사양했다.
이 시점 이후 크라수스가 등장하기까지의 기간의 경과 고전 사료에 의해 ​​내용이 크게 다르다. 현존하는 포괄적 인 내용의 앗삐아노스 와 플루타르코스 의 사서가 전하는 경과 자세한 내용은 크게 다르다. 그러나 다른 Geometry와 직접 충돌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건이 기술 된 다른 사료에 쓰여져있는 사건이 무시되어 있거나, 반대로 다른 방법은없는 사건이 묘사되고도있다.
크릭수스에게 승리한 게리우스는 북쪽으로 진군해서 갈리아 키사르피나로 향하는 스파르타쿠스 군단을 추적했다. 렌투루스 군단은 스파르타쿠스의 진로를 차단하도록 포진하고, 두 집정관의 군대는 반란 노예를 협공하려고 했다. 렌투루스의 군단과 충돌한 스파르타쿠스 군단은 그들을 격파하고 전진해서, 게리우스의 군단도 이기고 로마 군단을 어지럽히고 패주했다.

​아피아노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전사한 크릭서스의 보복으로 로마병 포로 300명을 검투로 죽을 때까지 싸우게 했다고. 로마 공화정 시대 검투 경기의 개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명예로운 행위였다. Florus의 사서에는 "그(스파르타쿠스)는 전장에 쓰러진 그의 부하들의 장례식을 로마의 장군의 형식으로 치루기 위해, 포로들에게 싸울 것을 명령했다"고 쓰여져 있다. 이 승리 후, 스파르타쿠스는 약 120,000명의 노예와 함께 북쪽으로 가서 불필요한 물품을 소각하고, 포로를 죽이고 짐을 동물은 도살했다.
스파르타쿠스가 북쪽으로 가는 동안 패배한 집권 관군은 로마에서 다시 재편성을 준비하고 스파르타쿠스와 다시 싸우지만, 또 배배했다.
5. 크라수스와의 전투
기원전 72년의 사건에 대해 고전 사료의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기원전 71년 상반기에 스파르타쿠스와 노예 집단이 이탈리아 남부에 있었다는 점은 대체로 일치한다. ​
원로원은 반란이 쉽게 제압되지 않자 위기를 느끼고, 진압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기원전 115년 경 – 기원전 53년)에게 맡긴다. 법무관이 된 크라수스는 프로콘술(proconsul)이라는 최고 사령관 지위가 돼서, 렌툴스과 게리우스 두 집정관 군단에 가세했다. 새로운 6개 군단이 배치되어, 그의 군대는로마병 4만에서 5만명이 되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군단병에 엄격하고 잔인한 징계를 적용해 11조형을 부활시켰다.
전쟁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크라수스의 군단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천명의 반란 노예를 죽였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를 남쪽으로 후퇴시켜 루카니아 지방을 지나 메시나 해협 건너편, 이탈리아 반도 최남단 칼라브리아 지방의 도시 레기움까지 몰아 넣었다.
스파르타쿠스 군대는 레기움으로 퇴각했다. 크라수스 군단은 그들을 추격하고 지협에 걸쳐 장성을 건설하기 시작, 저지하려는 반란 노예의 습격을 격퇴하며 완성시켰다. 반란군은 포위돼서, 보급이 끊겼다.
6. 반란군의 패배
Crassus crucified 6,000 of Spartacus's followers on the road between Rome and Capua. 1878 painting by Fedor Andreevich Bronnikov
이 때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한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크라수스가 증원을 요청했는지 원로원이 귀환하던 폼페이우스를 반란 진압에 ​활용하기로 결정했는지 사료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가지 않고 크라수스를 엄호하기 위해 남하했다. 원로원은 또한 "Lucullus" 휘하의 증원을 파견했으며, 폼페이우스의 군단이 남하해서 루쿨루스 군단이 브룬디시움에 도착할 경우, 크라수스가 반란을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승리의 영예가 증원군의 것이 될 수도 있다며 군단병들에게 시급히 반란을 종식하도록 격려했다.
폼페이우스의 접근을 알게 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의 증원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크라수스와 협상을 시도했다 . 하지만 크라수스가 거부하자 스파르타쿠스군의 일부가 포위망을 돌파하고, 크라수스 군단이 추격했다. 노예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12,300명이 살해 당하고 패배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전체 병력을 집결해서 다가오는 크라수스의 군대를 맞아했다. 해자를 둘러 싸고 기다리는 크라수스의 군단에, 스파르타쿠스는 "이기면 말은 얼마든지 얻을 수있다. 지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말을 죽이고 보병으로 싸웠다 .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를 죽이려고 소대장 2명을 죽이고 돌진해서 분전했지만, 결국 반란군은 전멸했다. 이 싸움에서 스파르타쿠스도 전사했지만,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반란군은 크라수스에게 괴멸했다. 폼페이우스 군단은 스파르타쿠스 군단과 직접 교전하지 않았지만, 남하한 그의 군단은 전장에서 도망친 반란병 5 ,000명을 잡았고 포로를 전부 죽였다. 이 행위 후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 특사를 보내 "물론 크라수스가 야전에서 노예들을 제압했지만, 이 반란을 끝낸 것은 나다"라고 전해서 명예를 요구했고, 크라수스와 대립하게 된다.
반란 노예의 대부분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6,000명이 크라수스에게 잡혀, 로마에서 카푸아에 이르는 아피아가도에 따라 십자가에 책형됐다.
7. 전쟁이 끝난 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반란 진압으로 정치적인 이득을 얻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군단병과 함께 로마로 귀환했지만, 그들은 군대 해산을 거부하고 지역에서 야영했다. 그들은 기원전 70년에 집정관으로 출마했는데, 폼페이우스는 자격 연령에 도달하지 않운대더 재무관도 법무관도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원전 70년 집정관으로 선출됐다. 그 이유는 지역에 야영하는 군단병의 무언의 압력이었다.
기원전 71년 말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의 반란 공적으로 개선식 거행이 허용됐지만, 크라수스의 반란군 진압 업적은 낮다고 해서 작은 개선식만 허락됐다.
이 반란으로 로마는 노예에 대한 취급이 한층 완화된다. 로마 노예 소유자 층 중에는 지금까지의 수탈에 대해 감독을 강화하는 한편, 노동 의욕을 더 증가시키기 위해 노예가 재산의 일부를 가지고 결혼해서 가족을 가지는 것도 허락하게 됐다. 부유한 라티푼디움의 소유자들은 농노의 수를 줄이고 토지를 잃은 자유민과 소작 계약을 맺었다. 기원전 52년에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이 끝나서, 로마에 의한 대규모 정복 전쟁은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년 - 117년)까지 끊이지 않던 정복으로 얻은 값싼 노예 노동력의 대량 유입도 끝났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에는 대농장의 자유민 고용이 더욱 증가했다. 노예들에게도 재산을 축적하고 자유를 얻고, 코로누스(소작농)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노예의 법적 지위와 권리도 변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 시대에 노인 및 어린 노예를 죽이면 살인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노예를 버린 경우 그들은 자유인으로 간주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Titus Aelius Hadrianus Antoninus Pius. 재위 138년 - 161년) 시대에는 노예의 권리가 확대되고 소유자는 노예 살해의 책임이 있으며, 또한 노예가 학대 당하면 중립적인 제3자 기관에 제기할 수 있고 인정되면 타인에게 매각됐다.
이런 변화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하기에는 시대가 다르다. 하지만, 몇 세대에 걸쳐 노예의 법적 조건과 로마 사회의 노예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노예 전쟁의 종결은 로마 사회의 노예 사용 전성기의 끝, 그리고 사회와 법의 노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시작 시기와 일치한다는 시각이 있다.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일련의 노예 전쟁의 마지막이며, 이후 로마는 이런 대규모 노예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8. 후세의 평가
Spartacus, marble sculpture by Denis Foyatier (1830), Louvre Museum
공화정 시대·제정 시대 로마의 역사 학자와 정치인들은 스파르타쿠스의 봉기(스파르타쿠스 전쟁)를 천한 노예와 그 중에서도 밑바닥인 검투사들이 일으킨 소란으로 묘사했다. 같은 시대 정치가인 키케로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가장 무서운 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진압하고 공화국의 위기를 구한 사람으로서 폼페이우스를 칭찬했다. 제정 시대 초반의 시인 호라티우스도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국가에 중대한 위험을 줬다고 평가했다. 키케로는 스파르타쿠스를 '도적단의 수령'이라고 부르며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를 스파르타쿠스에 비유해 욕하고, 그를 검투사에 비유했으며,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를 스파르타쿠스에 빗대 비난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한니발과 대등한 '로마의 적'으로 간주, 어른들은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스파르타쿠스가 온다'고 겁줬다. 제정 말기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재앙'이며 이교적인 로마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다고 말했다. 로마인에게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질서를 위협한 적이며, 그를 대의를 위해 싸운 영웅으로 묘사한 고대 사료는 없다.
스파르타쿠스를 재평가한 최초의 인물은 프랑스의 계몽가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 프란시스 마리 아루에)다.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부당한 억압에 대한 무력 투쟁이었다며 "역사상 유일하게 올바른 전쟁이었다"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이 다시 18세기부터 상기되기 시작, 1760년에 이 반란을 소재로 한 최초의 문예 작품인 비극 '스파르타쿠스'가 파리의 극장에서 상연됐다. 계몽주의적인 독일의 문학자 레싱(Lessing, Gotthold Ephraim)은 스파르타쿠스를 높게 평가하며 "나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18세기말에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아프리카인 노예 반란이 일어나 아프리카 대륙 이외에서는 최초의 흑인 국가가 탄생했다. 이 아이티 혁명 을 지도한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5.20 ~ 1803.4.7)는 '검은 스파르타쿠스'라고 불렸다.
그러나 부정적인 견해도 있었다.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헤겔은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혼란'이라고 평가했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는,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로 스파르타쿠스를 거론하며,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파르타쿠스를 "전체 고대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물','가리발디 와도 비교할 수 없을 위대한 장군이며 고결한 인격'이라고 극찬하며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평했다.

근대 이후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해방을 요구하는 노동자 계급의 상징으로서 사회 주의자·공산주의자 의 우상이 됐다.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통일 운동이 진행되고 있던 이탈리아에서 상기돼, 가리발디 아래에서 통일 전쟁을 위해 싸운 라파엘로 지오바놀리의 영웅 소설 '스파르타쿠스'를 저술, 가리발디가 그 서문을 기고했다. 미국의 노예 해방 운동과 체코의 민족 운동 중에서도 그의 이름이 연상되는 '고대 빈민'을 저술한 미국의 역사 학자 워드는 "저항하는 것은 악이 아니다"라고 노동자 계급에 호소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반전 운동을 전개한 독일 사회 민주당 좌파인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년 8월 13일 ~ 1919년 1월 15일)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정치적 서한'에 '스파르타쿠스'라고 서명하고, 그들의 정치 결사는 '스파르타쿠스단'이라고 했다.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 볼셰비키 권력을 확립한 레닌은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억압된 계급을 옹호하기 위해 일으킨 정의의 전쟁이며 비난할 수 없는 전쟁'이라며 피억압자가 자유를 추구한 최대의 내란이었다고 평가했다.

스탈린 체제 소련에서는 지식인에 의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억압 계급인 노예 소유자와 피억압 계급인 '정치적으로 각성한 노예'라는 계급 투쟁이라고 봤으며,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지배 계급을 타도하려는 혁명 투쟁으로 간주했다. 문화 방면에서도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소재로 한 발레 작품이 만들어져서 1954년 레닌상을 받는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 진영의 연구팀은 공산주의 국가의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연구의 결함을 지적하면서, 고대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현대의 계급 투쟁에 자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판했다. 이 시기의 일련의 노예 반란을 통일적인 노예 폐지 운동이라는 해석을 비판하고, 개인의 봉기는 고립적인 것이며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개인의 자유 획득이 목적이지 그들이 계급 의식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적 사관에서 벗어나면, 스파르타쿠스가 노예 제도의 폐지를 목표로 하고 계급 투쟁을 벌였다는 고전 사료 증거는 없으며 고대 사회에서 노예의 존재는 자명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공산권에서 스파르타쿠스가 높게 평가돼서 냉전 시대 미국은 반대로 경계하고, 적색 공포가 퍼져있던 1951년에 하워드 패스트(Howard Melvin Fast)가 쓴 소설 '스파르타쿠스'는 출판사가 출판을 거부해서 자비로 출판했다.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돼서, 이것을 원작으로 한 대작 영화 '스파르타쿠스 '가 1960년에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상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냉전 종결 후 민족 해방 운동에서도 우상이 됐으며,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의 실질적인 지도자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모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항한 자들의 상징으로 체 게바라와 함께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거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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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에 의하면 올림포스의 신들은 불멸이며, 끝없는 향연의 나날을 보낸다. 궁전에서 암브로시아를 먹고, 넥타르를 마신다고 한다. 올림포스 12 주신은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헤스티아, 아프로디테가 1세대,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가 2세대다.


JUPITER ET JUNON SUR LE MONT IDA / Artist: Antoine Coypel

제우스의 부인은 질투와 신성한 결혼의 수호 여신 헤라인데, 헤라와의 사이에서 전쟁의 신 아레스, 청춘의 여신 헤베,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티이아가 태어난다. 헤파이스토스는 헤라 혼자의 힘으로 탄생했다.
많은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는 지혜의 여신 메티스가 낳는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크로노스가 그랬듯이 메티스를 삼켰다. 그래서 메티스의 지혜를 갖게 됐는데, 어느 날 극심한 두통 때문에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해 자신의 머리를 가르게 했다. 그러자 무장한 여신이 우렁찬 함성과 함께 튀어나왔는데, 그녀가 정의로운 전쟁의 여신 아테나다. 또 대지와 풍요의 여신인 데메테르와는 훗날 저승의 여왕이 되는 페르세포네를 낳았다. 그리고 코이오스의 딸 레토와의 사이에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남매를 낳았다. 티탄인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와의 사이에서 헤르메스를 낳았고, 인간인 세멜레와의 사이에서는 디오니소스를 낳았다.

Vien, Joseph-Marie - Mars, Venus And Cupid (Allegory Of Love) 

아프로디테는 미와 사랑의 여신답게 신과 인간을 막론하고 남자에게 인기 있었다. 그런만큼 아이도 많이 낳았는데, 애인 아레스와의 사이에서 데이모스(걱정), 포보스(공포) 형제가 있다. 또 에로스는 헤시오도스가 원시 신으로 먼저 태어났다고 서술했지만,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에로스의 형제 안테로스도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라고 한다. 테베의 왕 카드모스의 아내 하르모니아도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제우스와 플레이아데스 7자매 중 하나인 엘렉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또 아프로디테는 헤르메스와 결합해 헤르마프로디토스도 낳았다. 한편 에로스가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하데스, 디오니소스, 헤파이스토스는 눈에 띄는 자손이 없다. 아폴론은 많은 연애담이 있지만 사랑에 실패한 경우가 많았기에, 자손은 많지 않다.

티탄들도 이 시기에 보인다. 제우스가 가이아 때문인지 타르타로스에서 티탄들을 해방시켜줬다는 설도 있다.
이아페토스의 아들 아틀라스는 하늘을 떠받치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다. 형제 프로메테우스는 '티타노 마키아'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인간에게 불을 갖다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Hercules and the Lernaean Hydra, 1875(Gustave Moreau,French,1826-1898)

이형의 신들도 있다. 고르곤 세 자매는 포르키스와 케토의 막내 딸 메두사나 새의 몸에 여성의 머리를 가진 하피는 유명하다.
에키드나는 상반신이 인간 모습의 여성이고 하반신은 뱀인데, 고르곤 3자매와 자매라는 설이 있다. 에키드나는 티폰과 많은 아이를 낳았다. 사자 머리에 염소의 몸, 뱀 꼬리를 가진 키메라, 헤라클레스가 물리친 물뱀 히드라, 저승의 개 케르베로스 등이다. 스핑크스도 에키드나의 자녀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흙에서 태어났다고 믿었다. 올림포스 신들의 선조인 티탄도 대지(가이아)의 자손이다. 이 믿음에 따르면 인간과 신은 형제다. 그러나 신들은 불멸하고 인간은 필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시오도스가 말하는 5가지 시대의 마지막 시대, 즉 현재인 '철의 시대'에 앞서 '영웅의 시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영웅은 고대 그리스어로 헤로스 (hērōs, ήρως )라고 부르는데, 의미는 '수호하는 자, 지키는 자'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은 반신이 많으며, 대부분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헤라클레스는 영웅을 넘어 거의 신으로 숭배 받았다.

제우스는 님프 혹은 인간과 교제해서 수많은 영웅의 아버지가 됐다. 헤라클레스도 제우스와 인간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는 또 황금 비로 변신해 인간 다나에게 접근해 페르세우스를 낳았다. 제우스는 하얀 황소로 변신해서 에우로페를 등에 실어 크레타 섬까지 헤엄쳐가 미노스를 낳았다. 이 외에도 많다.

Friday, October 30, 2015

greek mythology outline 그리스 로마 신화 개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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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로 ΜΥΘΟΛΟΓΊΑ ΕΛΛΗΝΙΚΉ라고 쓴다. 여느 신화와는 달리 신들이 인간처럼 애증극을 벌이는 이야기로, 책을 읽다보면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사상, 헬레니즘 시대 종교와 세계관, 기독교 신학 성립 등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서구의 정신적인 뼈대 중 하나가 됐다. 중세에도 전승돼서 르네상스 예술에 그림 등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오늘 날에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는데, 판타지 소설 등에서 고유한 속성을 가진 신들이 나오는 건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가 틀림없다. 또 현대 영어에서도 그리스 신화의 신들 이름이 어원이 되는 단어가 꽤 있다.



 Central part of a large floor mosaic, from a Roman villa in Sentinum (now known as Sassoferrato, in Marche, Italy), ca. 200–250 C.E. Aion
 

신계 시작

태초에 카오스(χάος)가 존재했다. 그 후 우라노스(하늘)와 가이아(대지)의 결합으로 거인 키클롭스들, 헤카톤케이레스들, 티탄족 아들 6명과 딸 6명을 낳았으며, 타르타로스와 심연에서 에로스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에레보스와 뉙스가 생겼다. 가이아는 바다의 신 폰토스를 낳았고, 폰토스는 '바다의 노인'이라고 불리는 신을 낳았다. 또 폰토스에게서 아들 타우마스(그리스어로 경이, 놀라움이라는 뜻)를 낳았고 이리스, 하피, 고르곤 세 자매를 낳았다.
한편 뉙스는 아이테르(대기)와 헤메라(낮)를 낳았다. 그리고 뉙스는 타나토스(죽음), 휘프노스(잠), 오네이로이(Ὄνειροι, 꿈)를 낳았다. 또 아틀라스와 그의 동생인 금성의 신 헤스페로스(Hesperos, 혹은 Vesper)도 이 때 태어났다고 한다. 작가들은 헤스페로스를 헤스페리데스의 아버지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모이라이(운명), 네메시스(복수), 에리스(불화)도 태어났다. 아테(파멸)는 에리스에게서 태어났다.
 
The Mutilation of Uranus by Saturn: fresco by Giorgio Vasari and Cristofano Gherardi, c. 1560 (Sala di Cosimo I, Palazzo Vecchio)
 
우라노스는 자신의 자식인 거인족들이 두려워 가이아=대지의 깊은 곳 타르타로스에 가뒀고, 이것 때문에 가이아는 원한을 품는다. 가이아는 낫으로 우라노스를 거세해달라고 자식들에게 부탁했는데, 유일하게 나선 신이 티탄족 막내 아들 크로노스다. 그는 낫으로 아버지를 거세해서 왕권을 빼앗았다.
 
우라노스에게서 신계의 지배권을 찬탈한 크로노스와 그의 형제 자매들은 세계를 관장하고 지배하게 됐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아직 신들의 역할 분담이 확실하지 않았다. 크로토스의 형제 자매들은 올림포스 12 신처럼 티탄 12 신이라고 불린다.
티탄 12 신은 다음과 같다.
 
1. Kronos / Cronus / Cronos / Κρόνος  크로노스
2. Rhea / Ῥέα 레아- 크로노스의 아내
3. Oceanos / Ὠκεανός / Ōkeanós 오케아노스 - 장자
4. Coeus / Κοῖος Koios 코이오스
5. Hyperion / Ὑπερίων 휘페리온
6. Crius / Kreios / Krios / Κρεῖος  크레이오스
7. Iapetos / Ἰαπετός  이아페토스
8. Thetys / Τηθύς  테티스
9. Themis / θέμις 테미스
10. Mnemosyne / μνεμοσυνη 므네모쉬네
11. Phoibe φοίβη 포이베
12 . Theia Θεία 테이아
 
티탄은 이외에도 많은 후손이 있다. 이아페토스의 아들인 아틀라스,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휘페리온의 아들인 에오스, 헬리오스, 셀레네가 있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와 어머니 가이아에게서 자신도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레아와의 결합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삼켰다. 레아는 막내인 제우스를 몰래 출산, 돌을 싸서 크로노스에게 줬다. 크로노스는 레아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했고, 레아는 '대지의 속살이다'라고 대답했다. 크로노스는 농담이겠거니 하고 삼킨다.


The fall of Lucifer. circa 1588.
 
올림포스 신들의 투쟁
 
빼돌린 크로노스의 막내 아들 제우스는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어, 그에게 약을 먹여 제우스의 누이와 형들을 토하게 했다. 그가 토한 아이들은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이다.
제우스와 형제 자매는 힘을 합해 크로노스와 티탄들과 전쟁하는데 이 전쟁의 '티타노 마키아'라고 한다.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는 특히 공을 세웠다. 제우스는 우뢰로 티탄에게 큰 타격을 줘 승리한다. 티탄족은 타르타로스에 유배된다. 제우스와 형제들은 제비뽑기로 하늘과 바다, 저승을 지배 영역으로 얻었다.
 
그러나 가이아는 제우스가 티탄을 유폐시킨 것에 분노해, 우라노스와 결합해 거인 기간테스들을 낳았다. 기간테스들은 제우스 가문에 싸움을 걸었고, 제우스 일행은 시실리 섬을 기간테스 위에 던져 떨어뜨리는 등 큰 싸움 끝에 그들을 물리쳤다. 이 싸움을 '기간토 마키아'라고 한다.
 
하지만 가이아는 포기하지 않고 타르타로스와 결합해 티폰을 낳았다. 티폰은 그리스 신화의 가장 큰 거인으로, 티포에우스라고도 한다. 머리에서 허벅지까지는 신의 형상이며 그 아래는 거대한 뱀이다.
신장은 별에 닿을 정도. 두 팔을 벌리면 동쪽과 서쪽의 끝까지 닿으며, 팔 끝에는 1백 개의 뱀머리가 돋아났다고.
눈과 입에서는 불을 뿜는다. 압도적인 힘을 자랑했지만 결국 올림포스 신들의 연계로 패배하고 산 아래 갇혔는데, 그 산이 에트나 화산이 됐다고 한다.
 
 

Wednesday, October 28, 2015

Healing amulet, health talisman 건강부적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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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isman of Zodiac

ORIGIN : Astrology
히브리어가 적혀있지만, 유대교가 아닌 중세 유럽에 성행했던 많은 Talisman 중 하나. 둘레에는 황도 12궁의 기호들이 있다.
서양의 점성술은 수성에서 시작해서 명왕성으로 끝나는 8개의 행성에 태양과 달을 더한 11개의 별과, 태어난 날이 어느 별자리에 위치해 있었는가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한다. 이 탈리스만은 별의 힘을 빌려서 질병, 특히 우울증을 예방하고 우정을 돈독하게 만들어준다고 전해진다.



Signum Hygeae

ORIGIN : Greece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시그눔 휘기에아라고 불리는 이 Talisman으로  편지에 도장으로 찍어서 친구의 건강을 기원했다.
펜타그램은 펜을 떼지 않고 한번에 그릴 수 있는 오망성이다. 다양한 문화권에 보이며, 그리스에서는 건강의 여신 Hygieia(휘기에이아)의 상징이다.
위생을 뜻하는 hygiene(하이지니)는 휘기에이아가 어원이다. 그래서 오망성은 건강의 상징(signum Salutatis)으로도 불린다.



펜타그램 반지는 건강을 지켜주는 부적이 되기도 하는데,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이 즐겼다. 주로 반지에 희랍어로 휘게이아 혹은 라틴어로 SALUS라고 새겼는데, 건강과 번영을 뜻한다. 반지가 원래 용도지만 도장으로도 사용됐다.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편지를 보낼 때 Signum Hygeae 반지로 도장을 찍어 상대의 건강을 기원했다.



Celtic Enneagram

ORIGIN : Celt
고대 켈트 신화에서 치유와 풍요의 여신 Brigit의 상징. 이 상징의 이름인 Pentagram이라는 단어는 9를 뜻하는 희랍어 에니아스와, 도형을 뜻하는 gram의 합성어로 펜타그램, 헥사그램처럼 그 형태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사람 성격을 9가지로 분류하는 심리 분석법을 에니어그램이라고도 해서, 이것은 따로 '켈틱 에니어그램'이라고 부른다.
9라는 수는 8가지 방위, 즉 사방팔방에 다시 중심점을 더한 숫자로 중심을 상징한다. 켈트 신화에서는 브리짓 여신의 상징이다.



Cabbalah Amulet 

ORIGIN : Cabbalah
병을 막아주는 Talisman. 역병, 특히 페스트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일에 사용했다. 그림은 카발라의 위인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제자 하임 바이탈(Hayyim Vital)이 만들었다.
16세기 중세는 질병이 악마의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이 그림의 글과 그림들은 카발라와 이교도의 마술적 요소들이 섞여 있다.



Talisman of Renewal 

ORIGIN : middle ages europe
중세시대 부적으로, 육체적인 소생을 도와준다. 이 탈리스만은 숫자 5가 중심인데, 5는 마법 체계에서 건강을 담당하는 화성과 관계있는 숫자. 마방진 가로와 세로, 대각선 숫자를 각각 더하면 모든 방향에서 15가 된다.  마방진 밑의 기호는 Samuel의 인장이라고 불린다.



Sun Coin

ORIGIN : Germany
중세 독일이 사용한 행복과 건강, 치유를 위한 Talisman. 별들의 힘을 빌리는 치유 부적으로, 건강과 행복의 상징.
원래는 금으로 만든다고 한다. 가장자리의 독일어 Dieser Taler ist von denen 7 Mineralien prepariert는 이것은 7개의 광물을 위해 준비됐다는 뜻. 각각의 7개의 광물은 7개의 행성 기호에 상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