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2, 2015

Alexandros the Great 알렉산더 대왕, 혹은 알렉산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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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3세(그리스어 : Ἀλέξανδρος Γ' , 영어 : Alexandros the Great, 기원전 356년 7월 20 일 - 기원전 323년 6월 10일 , 재위 기원전 336년 - 기원전 323년), 통칭 알렉산더 대왕(그리스어 : Ἀλέξανδρος ὁ Μέγας)은, 아루게아스 주 마케도니아 왕국의 바시레우스겸 코린토스 동맹(헬라스 동맹)의 맹주, 이집트의 파라오였다. 912년 5월부터 913년 6월 6일까지 13개월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였다.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우스가 선조라고 해서, 그리스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로스(Αλέξανδρος.'지킴'이라는 뜻의 'αλέξ'와 '남자'라는 뜻을 가진 낱말의 소유격 'ανδρος'의 합성어)지만, 영어식으로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다. 한니발, 율리우스 카이사르, 나폴레옹 등 역사적 인물들에게 영웅으로 존경 받았다. 구약성경과 코란 , 샤나메 ,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민족의 성경에도 등장한다.



 Alexander III (356-323 BC) the Great before the Tomb of Achilles


왕위에 오르다

알렉산더 3세는 필리포스 2세와 에페이로스의 공주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필리포스 2세는 헤라클레스를 선조로 하는 가계, 올림피아스는 아킬우레스을 선조로 하는 가문이라서, 그리스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두 영웅의 혈통을 가졌다고 한다.

기원전 342년 , 필리포스는 아테네에서 마케도니아인 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를 교사로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시 페라에서 떨어진 미에자 학원에서 기원전 340년까지 알렉산더와 그 동창을 가르쳤다. 알렉산더는 "필리포스 2세에게서 생명을 받았지만, 고귀하게 사는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했다. 또한 그와 함께 그리스 의 기초적인 교양을 몸에 익히고 동창들은 나중에 알렉산드로스를 지원하는 장군이 됐다.

Entrée d'Alexandre le Grand dans Babylone ou Le triomphe d'Alexandre 


필리포스 2세와는 사이가 나빴다. 필리포스의 후처인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인 아툴루스가 "이 결합으로 마케도니아에 좋은 후계자가 탄생하기를 바란다"고 하자 알렉산드로스가 "너는 내가 보이지 않는가"하며 술잔을 던졌다.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를 추방했다고 한다. 때문에 알렉산드로스가 필리포스를 암살했다는 설이 있다.

그는 왕위에 올라 왕위 계승을 다툰 왕자들을 전부 죽였다. 아툴루스도 처형 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아들을 제외한 전부가 처형 당했는데, 아들이 용서받은 이유는 올림피아스가 독을 먹여서 미치광이가 됐기 때문이라고. 또 올림피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딸을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상의 없이 일을 저질렀다고 화를 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리스 전체의 반란에 직면하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측근들은 모두 외교로 해결하라고 조언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기병 3,000명만 이끌고 남하한다. 마케도니아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폴리스인 테살리아가 먼저 제압당했고, 테살리아의 병력을 인수한 알렉산드로스가 남하하자 모든 그리스의 도시들이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했다.

1년 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하기 전에 북쪽 국경을 안전하게 해두고 싶었는지, 지금의 이스탄불 북서쪽에 위치한 트라키아인들을 공격하여 제압하고 도나우 강까지 올라가 그 곳에 위치하고 있던 게타이(훗날의 다키아) 부족을 격파한다. 그 때 일리리아(그리스의 서쪽, 이탈리아와 아드리안 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렉산드로스는 즉각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모두 진압한다. 그 때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헛소문이 그리스에 퍼졌고, 테베가 반란을 선동하고 여기에 편승해 아테네도 반란에 참여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를 점령하고 도시를 파괴했으며,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서 아테네와 쌍벽의 강력한 도시 테베는 멸망했다. 다만 시인 핀타로스의 집은 부하들에게 파괴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아테네는 테베의 멸망을 보고 항복했다.

정복

알렉산더 3세는 기원전 334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마케도니아군 38,000명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가기 위해 소아시아로 갔는데 그 곳에서 태수의 연합군 40,000명과 대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 선두에 서서 말을 몰며 돌진해 적장 미토리다테스를 사로잡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아군 장병의 신뢰를 얻고 적에게는 공포를 준다. 마케도니아군은 소아시아에 주둔하는 페르시안 군대를 물리치며 동쪽으로 진격한다.

동방을 정벌하러 가던 중, 알렉산드로스의 요청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군주론>과 <식민지론>을 썼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도 각국에서 동물과 식물을 보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을 관찰하며 연구를 계속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교류는 이렇게 알렉산드로스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Battle of Issus(Albrecht Altdorfer, 1480~1538) 


기원전 333년, 마침내 알렉산더는 안티오크 북서쪽 이수스에서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 100,000명과 조우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과 호위병, 징집병을 종횡무진 지휘하고 페르시아군을 이겨서, 다리우스의 어머니와 아내, 딸을 포로로 잡았다. 이 때 페르시아가 화목을 제안하지만 거절하고 계속 진군하고 시리아에서 남하해 이집트에 침입했다.

다리우스 3세가 제의한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땅을 몽땅 양보한다는 것에 자신의 가족의 몸값으로 1만 탈렌트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대략 3천억원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아시아의 왕이므로 영토 분할은 자신의 권한이라고 답한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파르메니온이 '내가 알렉산드로스 왕이라면 이 강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파르메니온이었으면 그랬겠지'라고 대답했다.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왕비가 이수스 전투로 포로가 됐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존중했다.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도량을 칭찬하며, 만약 자신이 왕국을 잃으면 알렉산드로스가 왕이 되도록 신에게 기도했다.

이집트는 이 시점에서 11년 전인 기원전 343년에 아닥사스다 3세에게 정복됐고 페르시아의 통치가 뿌리 내리지 않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기원전 332년, 이집트에게 해방자로 영입된 알렉산더는 파라오로 인정받아 신상이 아문 신전에 만들어졌다. 그는 소수 부대를 이끌고 서부 사막의 아문 성지로 가서, 여기에서 스스로를 아몬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탁을 받았다. 아몬은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동일시되며,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신탁이나 다름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크게 만족해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것을 기념하는 동전도 발행했는데, 이 동전에는 알렉산드로스의 두상에 아몬 신의 상징인 숫양의 뿔이 달린 모습을 새겼다. 또한 그는 나일 델타 서쪽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가 현재 알렉산드리아의 기원이다.

이집트에서 장병에게 충분한 보급과 휴식을 준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왕국으로 원정을 재개한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군단은 47,000명은 티그리스 강 상류의 가우가멜라에서 20만에서 30만으로 추정되는 다리우스 3세 휘하의 페르시아 군단을 물리치고, 다리우스는 카스피해 동쪽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되자 페르시아 왕국은 풍전등화가 됐다. 페르시아 왕국 중추에 난입한 마케도니아 군단은 바빌론과 주요 도시를 약탈했고, 페르세폴리스는 민간인도 학살하고 철저하게 도시를 파괴했다. 페르세폴리스의 파괴는 페르시아 전쟁 때 페르시안이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도 있다. 페르시아 중추를 점령하고 나서 알렉산더 군단은 다리우스를 쫓아 진격했다.

이듬해 다리우스 3세가 왕족 측근이었던 베소스에게 암살되자,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다리우스가 죽은 뒤에도 베소스는 페르시아 국왕을 자칭하며 항전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베소스의 불충을 규탄하고 베소스를 잡아 공개 처형했다.

중앙 아시아 방면으로 침공한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반란을 일으킨 스피타메네스를 중심으로 한 소그드디아나인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마케도니아 군대는 기원전 329년부터 기원전 327년까지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의 거친 게릴라 전투( Siege of the Sogdian Rock)를 강요 당해, 장병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호전적인 유목민인 스키타이이 공격했지만, 알렉산드로스와 그 부하인 쿠라테로스는 유목민 기병에게도 승리했다.

유목민 왕이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은 무엇이든 들을테니 용서해 주시오"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크레토스 살해 사건과 근습에 의한 음모 사건 등 알렉산더와 부하들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8년에 귀순한 이 지방의 유력자, 옥시아르테스의 딸 록사네(Roxane)를 왕비로 삼았다.

The Battle of Alexander at Issus(Albrecht Altdorfer, 1480~1538)


페르시아 왕국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로 원정을 떠났다. 스와토 계곡에서 코휀 전쟁, 아오루노스 공성전, 기원전 326년에 인더스 강을 넘어 펀자브 지방에 침입해 5월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파우라바 족의 왕 포로스에게 승리했다. 그 후에도 주변의 제부족을 평정하면서 진군해, 인도에서 가장 용맹하다는 카타이오이들도 제압했다.

11월부터 알렉산드로스는 Hydraotes 강을 남하해서, 전군을 3개로 분할하고 쿠라테로스와 함께 잔존하는 적대 세력을 내쫓았다. 그리고 인더스 강을 남하해 Patala로 갔다. 게도로시아 사막을 통해 카루마니아에 가서 기원전 324년에 스사(Susa)에 귀환했다. 이 때, 부하의 네아르코스에게 인더스에서 페르시아만을 통해 유프라테스 강 하구까지 항해할 것을 명령했다. 이 탐험 항해에 의해 이 지역의 지리가 밝혀졌고, 네아르코스가 남긴 자료는 소실됐지만 스트라본 등에게 인용된 귀중한 기록이 있다.

동방 원정 중 술에 독이 들어 있었는데, 알렉산더가 이것을 알아채고 젊은 장교들에 의한 알렉산드로스 암살 계획이 발각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설명이 모두 다르다. 주동자로 사령관 중 한명인 휘로타스의 이름이 거론된다. 휘로타스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그의 의형제들이 고문 끝에 자백해서 유죄 판결이 나 처형됐다.

영향

Alexandre le Grand faisant porter à Aristote divers animaux étrangersafin qu’il écrive son Histoire naturelle - Jean-Baptiste de Champaigne


Diogène visité par Alexandre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는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그 후계 왕조에 뿌리내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 빈사의 갈리아인 등의 조각이 만들어졌다. 에우클레이데스, 아폴로, 아르키메데스, 에라토스테네스, 아리스타쿠스 등의 학자들도 배출하고 고대 로마에 강한 영향을 미쳐 사산 제국에도 영향을 줬다.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마케도니아인은 고난을 견디는숙달된 좋은 군인이었다. 또 알렉산드로스는 상황에 따라 다른 혼성 부대를 편성해서 다양한 스타일의 적에게 유연하게 대응했다. 예를 들어, 유목민 스키타이와의 전투에서 적의 hit and away 전법에 투창 기병대와 경장 보병의 혼성 부대를 이용해 승리했다. 유능한 전술가인 알렉산드로스의 휘하였던 마케도니아 군대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전술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는 전사로도 유능했다. 알렉산드로스 스스로 행군 중에 있어도 짐마차에 승하차하고 몸을 단련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항상 최전선에서 장병과 함께 싸우고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 중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고대 그리스에서 사령관은 뒤에 안전한 장소에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싸우는 관습이 있어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장에서 위기를 넘겨 신의 보호를 받는 전사라고, 장병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급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제국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크리스(코린토스 동맹) 3지역으로 재편하고 알렉산드로스에 의한 동군 연합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페르시안을 적극 등용하는 등, 페르시안과 마케도니아인의 융화를 도모했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 후계자를 선포했는데, 페르시아 왕의 의복을 입고 페르시아 풍의 의례와 통치를 도입해서 마케도니아인의 반발을 샀다.

바빌론에 돌아온 알렉산더는 아라비아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해군 제독이었던 네아르코스와의 파티로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신 뒤 몸에 열이 나기 시작, 고열이 계속된다. 일주일 뒤 그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다음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틀 뒤인 기원전 323년 6월 10일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0일 동안 고열에 시달리다 "강한 자가 제국을 상속하라"고 유언하고 죽었다고 하지만 말을 못하던 사람이 어떻게 유언을 남겼는지 의문. 이것은 후대가 덧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남겨진 대제국은 그의 유장들이 바빌론 회의, 트리파라디소스의 군회 이 두번의 협정으로 안정화하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유언에 충실하게 패권을 다투게 되고, 안티고노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다른 여러 장군에 의한 디아도코이 전쟁을 거쳐 분열했다. 기원전 3세기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헬레니즘 세개의 왕국이 출현, 그들은 서로 싸웠지만 이 3국 정립이 자리잡게 됐다.

그 후 기원전 168년에 안티고노스 왕조가 멸망한 것을 시작으로, 서쪽은 순차적으로 로마에 병합되고 헬레니즘 제3국은 전부 로마가 멸망시켰다. 동방은 파르티아가 발흥해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 대부분을 빼앗고, 동방 령은 마케도니아인의 손을 떠났다. 이후 동부 지중해에서 중앙 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은 이슬람 제국의 출현까지​다시 큰 통일을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은 페루디카스가 바빌론에서 왕도 페라로 이송하던 도중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강탈돼, 미라로 이집트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일족은 디아도코이 전쟁 중에 살해당해 알렉산드로스의 혈통은 단절됐다.

일화

알렉산더 대왕이 리디아의 수도 골디온을 점령했을 때(기원전 333년) 마을의 중심에 있는 제우스 신전에 하나의 오래된 전차가 있었다. 그 전차는 '고르 디오스의 매듭'이라고 불리는 얽힌 줄이 있었다. 그 곳에는 <이 매듭을 푼 자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 전설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검으로 매듭을 절단하고 "운명은 전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검에 의해 개척하는 것"이라고 병사들에게 선언했다.
코린토스에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언제나 알몸으로 거닐고 있었는데, 본인은 그런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어느 날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디오게네스를 찾아 온 알렉산드로스는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대답은 "그늘이 지니까 거기에서 비켜달라'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만약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Alexandre coupe le noeud gordien

알렉산드로스는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좋아했다. 동방 원정에서 소아시아로 건너갈 때 멀리 떨어져 있는 트로이에 일부러 가서, 아킬레우스의 무덤에 화환을 바쳤다. 또, 거기에 있던 아테나 신전에 자신의 무기들을 봉납하고 대신 트로이 전쟁 때부터 전해지는 갑옷을 받았다고 한다. 트로이에서 받은 거룩한 방패를 항상 갖고 다니며 전투시에는 그것을 부하에게 들게 하고 자신 앞에서 전진하도록 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믿었다. 인도 북부를 침공했을 때 헤라클레스도 정복하지 못했다는 난공불락 아오루노스라는 바위 산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알렉산드로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뜬 소문이며, 현지에 그런 전승은 없다고.

"만약 그가 신이 되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그냥 신이라고 불러줄 수 밖에"
알렉산드로스가 도시 국가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대우하라고 명령했을 때 스파르타인 Damis가 한 말.

알렉산더 대왕은 양성애자였다. 친구인 헤파이스티온(Hephaistion)이 애인이었다. 그가 죽자 병을 낫게하지 못한 의사를 죽였다는 말이 있다. 또 페르시아 출신 환관 바고아스와의 염문도 있다.

Apelle et Campaspe

Alexandre le Grand cédant Campaspe à Apelle

알렉산드로스는  화가 아펠레스에게 첩 캄파스페를 모델로 미의 여신을 그리게 했다. 아펠레스와 캄파스페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들의 밀회를 목격한 알렉산드로스는 "칼의 제왕이 붓의 제왕에게 졌다"며 캄파스페를 양보한다.

아랍과 페르시아에서는 이스칸달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알렉산더 3세의 용맹은 이슬람 세계에 일종의 영웅 전설로 전해진다. 중동 전승에서는 알렉산드로스에게 2개의 뿔이 있다고 하며(앞서 언급한 동전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남아시아에 이스칸달라는 남성 이름이 있는 것은 이슬람교가 동진해서 이 영웅 전설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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