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 2015

Third Servile War(War of Spartacus)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시작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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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투사 양성소에서 탈출
기원전 1세기 공화정 로마에서 검투사 경기는 인기 있었다. 경기에 나가는 검투사를 공급하려고 많은 검투사 양성소가 만들어졌다. 이 양성소에서는 전쟁 포로나 노예 시장에서 매매된 사람이나 지원한 자유 시민이 검투사가 돼서 싸움 기술을 배웠다. 강한 검투사는 부와 명예를 얻었고, laniste가 될 수 있었다. 경기에 패배한다고 해서 반드시 죽지는 않았지만, 계속되는 경기에서 살아남아 자유 시민이 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인 검투 노예로, 캄파니아 지방 카푸아의 그네우스 콘넬리우스 렌툴루스 바티아누스(Gnaeus Cornelius Lentulus Batiatus)가 소유한 검투사 양성소에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트라키아의 마이도이족 출신이라고 서술했으며, 아피아노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원래 로마 군단의 보조병이었지만, 포로가 돼서 팔려 검투사가 된 트라키아인이라고 전했다. 플로루스는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메디족 출신. 미토리다테스 전쟁에서 폰토스 왕국 용병으로 참전. 메디족이 로마와 강화(講和)해서 나중에는 로마 병사가 됐지만, 반로마 투쟁을 벌였다. 후에 로마군 포로가 돼서 노예로 팔려가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로 갔다>고 서술. 테오도어 몸젠(Theodor Mommsen)은 보스포러스 왕국 트라키아계 왕가 후손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또 사료가 말하는 트라키아는 민족이 아니라 검투사 스타일 -트라키아 검투사라는 타입이 있다- 이 아닌가 하는 이론도 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남쪽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은 검투사가 번성 한 곳이며, 가장 오래된 검투사 양성소는 카푸아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기원전 73년 검투 노예 200명이 탈주를 계획했다. 밀고에 의해 계획이 새나가자 약 70명의 노예가 주방 조리 도구를 무기로 양성소를 탈출하고, 지나가던 여러 대의 마차에서 검투사의 무기와 갑옷도 손에 넣었다. 도망쳐 자유로워진 검투사들은 스파르타쿠스와 갈리아인 2명, 크릭서스와 오에노마우스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도망친 노예들은 카푸아에서 파견된 토벌대를 격퇴하고, 군대의 무기를 가졌다. 양성소에서 탈출한 직후의 동향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다르지만, 도망친 검투사 집단이 카푸아 주변을 약탈하고 그 곳의 노예들을 동료로 만들어 베스비우스 화산에 갔다는 점은 대체로 일치한다.
2. 잇따른 승리​
봉기와 습격이 일어난 캄파니아는 로마의 자산가나 유력자의 휴양지며, 여기에는 많은 별장이 있어 금방 로마 정부가 반란을 주시했다. 당초 이 반란은 무장 봉기가 아니라 대규모 치안 악화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 해 하반기에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법무관이 이끄는 토벌군을 파견.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자갈은 병사 3,000명을 모았지만, 이것은 군단병이 아니라 민병대며, 로마인들은 이것을 전쟁이 아니라 도적의 습격으로 간주. 자갈의 병사는 베스비우스산의 노예 군을 포위하고 산으로 통하는 유일한 도로를 폐쇄했다. 노예군을 갇히가뒀다고 생각한 자갈은 굶주림에 시달리던 노예들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노예들은 군사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스파르타쿠스의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자재를 활용해 로마군에 맞섰다. 자갈의 포위 작전에 스파르타쿠스의 부하들은 베스비우스산 중턱에 자라던 덩굴과 나무를 이용해서, 줄이나 사다리를 만들어 자갈군의 배후 절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배스비우스 산기슭을 돌아, 자갈군의 배후를 파고들어 그들을 섬멸했다.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Publius Varinius)가 이끄는 2번째 토벌군이 스파르타쿠스에 보내졌다. 와리니우스 군대는 부하인 프리우스와 코시니우스 부대로 나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프리우스 병사를 3,000명이라고 규정했지만, 부대의 병력, 토벌군이 정규 군단병인지 민병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토벌군도 노예 군대에게 격파돼서, 코시니우스는 전사하고 와리니우스는 노예들을 놓쳤으며, 장비도 빼앗겼다.
이 승리로 그 지방의 목인 노예를 포함한 많은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 군대에 참집, 노예군은 약 70,000명까지 치솟았다. 반란 노예는 기원전 73년에서 72년 사이 겨울을 신병들의 훈련과 무장화에 투자해서 습격 범위를 넓혔다.
노예측도 손실을 입었다. 반란 초기에 지도자중 한명이었던 오에노마우스도 전사했는지 그의 이름은 여러 사료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3. 늘어난 반란군

The Death of Spartacus by Hermann Vogel (1882)

반란군의 규모는 사료에 따라 다르지만, 전성기에는 120,000명에서 200,000명,최종 국면는 300,000명 이상이었다고 추정한다. 그 구성은 고전 사료에서 검투사, 목자 노예, 탈주 노예, 수공업 노예 이외에 경작지 자유 시민(빈농), 삼니움의 하층민, 그리고 로마 군단 도망자도 있었다고 한다. 이 중 농노가 대부분이었다고 추정되며, 스파르타쿠스는 뒤늦게 로마 군단에서 도망자의 수용을 멈춘다. 민족으로는 게르만인, 켈트인(갈리아인), 스코루디스키 , 트라키아인 그리고 이탈리아(자유인이나 노예)가 존재했지만 로마인의 노예였던 그리스, 시리아 동방 노예, 히스파니아, 아프리카 출신 노예는 고전 사료에 언급이 없다.

아피아노스는의 반란군 군기가 엄격했다고 전한다. 스파르타쿠스는 약탈품을 평등하게 분배했고, 금의 개인 소유를 금지했다고. 불필요한 폭행과 약탈 등 일탈 행위도 금지했다고 한다.
반란군의 목적에 대해 아피아노스는 로마 진군에 있었다고 서술했으나, 이것은 당시 로마 시민의 공포를 반영했다는 해석이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갈리아 키사르피나까지 북상해서​그의 동료들을 고향으로 돌려주고 싶어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몸젠을 비롯한 근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자유를 얻으려하는 스파르타쿠스파와 남부 이탈리아에 머물며 약탈을 계속하려고 하는 크릭수스파와 도망 노예들이 분열했다고 말한다. 플루타르코스도 도망 노예의 일부가 알프스를 넘어 탈출하는 것보다 이탈리아를 약탈할 것을 바랐다고 말한다. 분열이 발생했다고 언급하는 고전 사료는 없다.
 4. 집권 관군의 패배
로마는 서방의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 기원전 72년 죽음)의 반란이 기원전 77 년부터 계속됐으며, 기원전 73년에는 동방의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재개했다( 제3차 미토리다테스 전쟁 ). 동부 지중해에서는 크레타 해적이 날뛰었고 로마의 보급로를 위협했는데, 이런 위기에 이탈리아 본토에서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발발한 것이다.​
​기원전 72 년, 도망찬 노예들은 동영 지역을 떠나 갈리아 키사르피나로북상했다.
반란군의 규모와 자갈 및 와리니우스 두 법무관의 패배에 위기를 느낀 원로원은 그해 집정관이었던 코르넬리우스 렌툴스 클라디아누스와 루키우스 게리우스 푸브리골라가 이끄는 로마군을 파견했다. 게리우스 군단은 가르가누스 산록에서 크릭수스가 지휘한 반란군 30,000명과 싸웠다. 게리우스가 크게 승리하고, 크릭수스를 포함한 반란병의 2/3가 죽었다 . 이 싸움은 훗날 카이사르의 정적이 될 젊은 소 카토(Marcus Porcius Cato Uticensis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기원전 95년 ~ 기원전 46년. 소 카토라고 불리는 이유는, 같은 이름을 가진 대 카토의 증손자기 때문)도 종군해서 활약했다. 게리우스는 소 카토에게도 보상을 주려고 했지만, 그는 사양했다.
이 시점 이후 크라수스가 등장하기까지의 기간의 경과 고전 사료에 의해 ​​내용이 크게 다르다. 현존하는 포괄적 인 내용의 앗삐아노스 와 플루타르코스 의 사서가 전하는 경과 자세한 내용은 크게 다르다. 그러나 다른 Geometry와 직접 충돌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건이 기술 된 다른 사료에 쓰여져있는 사건이 무시되어 있거나, 반대로 다른 방법은없는 사건이 묘사되고도있다.
크릭수스에게 승리한 게리우스는 북쪽으로 진군해서 갈리아 키사르피나로 향하는 스파르타쿠스 군단을 추적했다. 렌투루스 군단은 스파르타쿠스의 진로를 차단하도록 포진하고, 두 집정관의 군대는 반란 노예를 협공하려고 했다. 렌투루스의 군단과 충돌한 스파르타쿠스 군단은 그들을 격파하고 전진해서, 게리우스의 군단도 이기고 로마 군단을 어지럽히고 패주했다.

​아피아노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전사한 크릭서스의 보복으로 로마병 포로 300명을 검투로 죽을 때까지 싸우게 했다고. 로마 공화정 시대 검투 경기의 개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명예로운 행위였다. Florus의 사서에는 "그(스파르타쿠스)는 전장에 쓰러진 그의 부하들의 장례식을 로마의 장군의 형식으로 치루기 위해, 포로들에게 싸울 것을 명령했다"고 쓰여져 있다. 이 승리 후, 스파르타쿠스는 약 120,000명의 노예와 함께 북쪽으로 가서 불필요한 물품을 소각하고, 포로를 죽이고 짐을 동물은 도살했다.
스파르타쿠스가 북쪽으로 가는 동안 패배한 집권 관군은 로마에서 다시 재편성을 준비하고 스파르타쿠스와 다시 싸우지만, 또 배배했다.
5. 크라수스와의 전투
기원전 72년의 사건에 대해 고전 사료의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기원전 71년 상반기에 스파르타쿠스와 노예 집단이 이탈리아 남부에 있었다는 점은 대체로 일치한다. ​
원로원은 반란이 쉽게 제압되지 않자 위기를 느끼고, 진압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기원전 115년 경 – 기원전 53년)에게 맡긴다. 법무관이 된 크라수스는 프로콘술(proconsul)이라는 최고 사령관 지위가 돼서, 렌툴스과 게리우스 두 집정관 군단에 가세했다. 새로운 6개 군단이 배치되어, 그의 군대는로마병 4만에서 5만명이 되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군단병에 엄격하고 잔인한 징계를 적용해 11조형을 부활시켰다.
전쟁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크라수스의 군단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천명의 반란 노예를 죽였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를 남쪽으로 후퇴시켜 루카니아 지방을 지나 메시나 해협 건너편, 이탈리아 반도 최남단 칼라브리아 지방의 도시 레기움까지 몰아 넣었다.
스파르타쿠스 군대는 레기움으로 퇴각했다. 크라수스 군단은 그들을 추격하고 지협에 걸쳐 장성을 건설하기 시작, 저지하려는 반란 노예의 습격을 격퇴하며 완성시켰다. 반란군은 포위돼서, 보급이 끊겼다.
6. 반란군의 패배
Crassus crucified 6,000 of Spartacus's followers on the road between Rome and Capua. 1878 painting by Fedor Andreevich Bronnikov
이 때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한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크라수스가 증원을 요청했는지 원로원이 귀환하던 폼페이우스를 반란 진압에 ​활용하기로 결정했는지 사료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가지 않고 크라수스를 엄호하기 위해 남하했다. 원로원은 또한 "Lucullus" 휘하의 증원을 파견했으며, 폼페이우스의 군단이 남하해서 루쿨루스 군단이 브룬디시움에 도착할 경우, 크라수스가 반란을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승리의 영예가 증원군의 것이 될 수도 있다며 군단병들에게 시급히 반란을 종식하도록 격려했다.
폼페이우스의 접근을 알게 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의 증원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크라수스와 협상을 시도했다 . 하지만 크라수스가 거부하자 스파르타쿠스군의 일부가 포위망을 돌파하고, 크라수스 군단이 추격했다. 노예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12,300명이 살해 당하고 패배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전체 병력을 집결해서 다가오는 크라수스의 군대를 맞아했다. 해자를 둘러 싸고 기다리는 크라수스의 군단에, 스파르타쿠스는 "이기면 말은 얼마든지 얻을 수있다. 지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말을 죽이고 보병으로 싸웠다 .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를 죽이려고 소대장 2명을 죽이고 돌진해서 분전했지만, 결국 반란군은 전멸했다. 이 싸움에서 스파르타쿠스도 전사했지만,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반란군은 크라수스에게 괴멸했다. 폼페이우스 군단은 스파르타쿠스 군단과 직접 교전하지 않았지만, 남하한 그의 군단은 전장에서 도망친 반란병 5 ,000명을 잡았고 포로를 전부 죽였다. 이 행위 후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 특사를 보내 "물론 크라수스가 야전에서 노예들을 제압했지만, 이 반란을 끝낸 것은 나다"라고 전해서 명예를 요구했고, 크라수스와 대립하게 된다.
반란 노예의 대부분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6,000명이 크라수스에게 잡혀, 로마에서 카푸아에 이르는 아피아가도에 따라 십자가에 책형됐다.
7. 전쟁이 끝난 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반란 진압으로 정치적인 이득을 얻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군단병과 함께 로마로 귀환했지만, 그들은 군대 해산을 거부하고 지역에서 야영했다. 그들은 기원전 70년에 집정관으로 출마했는데, 폼페이우스는 자격 연령에 도달하지 않운대더 재무관도 법무관도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원전 70년 집정관으로 선출됐다. 그 이유는 지역에 야영하는 군단병의 무언의 압력이었다.
기원전 71년 말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의 반란 공적으로 개선식 거행이 허용됐지만, 크라수스의 반란군 진압 업적은 낮다고 해서 작은 개선식만 허락됐다.
이 반란으로 로마는 노예에 대한 취급이 한층 완화된다. 로마 노예 소유자 층 중에는 지금까지의 수탈에 대해 감독을 강화하는 한편, 노동 의욕을 더 증가시키기 위해 노예가 재산의 일부를 가지고 결혼해서 가족을 가지는 것도 허락하게 됐다. 부유한 라티푼디움의 소유자들은 농노의 수를 줄이고 토지를 잃은 자유민과 소작 계약을 맺었다. 기원전 52년에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이 끝나서, 로마에 의한 대규모 정복 전쟁은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년 - 117년)까지 끊이지 않던 정복으로 얻은 값싼 노예 노동력의 대량 유입도 끝났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에는 대농장의 자유민 고용이 더욱 증가했다. 노예들에게도 재산을 축적하고 자유를 얻고, 코로누스(소작농)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노예의 법적 지위와 권리도 변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 시대에 노인 및 어린 노예를 죽이면 살인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노예를 버린 경우 그들은 자유인으로 간주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Titus Aelius Hadrianus Antoninus Pius. 재위 138년 - 161년) 시대에는 노예의 권리가 확대되고 소유자는 노예 살해의 책임이 있으며, 또한 노예가 학대 당하면 중립적인 제3자 기관에 제기할 수 있고 인정되면 타인에게 매각됐다.
이런 변화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하기에는 시대가 다르다. 하지만, 몇 세대에 걸쳐 노예의 법적 조건과 로마 사회의 노예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노예 전쟁의 종결은 로마 사회의 노예 사용 전성기의 끝, 그리고 사회와 법의 노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시작 시기와 일치한다는 시각이 있다.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일련의 노예 전쟁의 마지막이며, 이후 로마는 이런 대규모 노예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8. 후세의 평가
Spartacus, marble sculpture by Denis Foyatier (1830), Louvre Museum
공화정 시대·제정 시대 로마의 역사 학자와 정치인들은 스파르타쿠스의 봉기(스파르타쿠스 전쟁)를 천한 노예와 그 중에서도 밑바닥인 검투사들이 일으킨 소란으로 묘사했다. 같은 시대 정치가인 키케로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가장 무서운 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진압하고 공화국의 위기를 구한 사람으로서 폼페이우스를 칭찬했다. 제정 시대 초반의 시인 호라티우스도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국가에 중대한 위험을 줬다고 평가했다. 키케로는 스파르타쿠스를 '도적단의 수령'이라고 부르며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를 스파르타쿠스에 비유해 욕하고, 그를 검투사에 비유했으며,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를 스파르타쿠스에 빗대 비난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한니발과 대등한 '로마의 적'으로 간주, 어른들은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스파르타쿠스가 온다'고 겁줬다. 제정 말기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재앙'이며 이교적인 로마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다고 말했다. 로마인에게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질서를 위협한 적이며, 그를 대의를 위해 싸운 영웅으로 묘사한 고대 사료는 없다.
스파르타쿠스를 재평가한 최초의 인물은 프랑스의 계몽가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 프란시스 마리 아루에)다.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부당한 억압에 대한 무력 투쟁이었다며 "역사상 유일하게 올바른 전쟁이었다"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이 다시 18세기부터 상기되기 시작, 1760년에 이 반란을 소재로 한 최초의 문예 작품인 비극 '스파르타쿠스'가 파리의 극장에서 상연됐다. 계몽주의적인 독일의 문학자 레싱(Lessing, Gotthold Ephraim)은 스파르타쿠스를 높게 평가하며 "나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18세기말에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아프리카인 노예 반란이 일어나 아프리카 대륙 이외에서는 최초의 흑인 국가가 탄생했다. 이 아이티 혁명 을 지도한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5.20 ~ 1803.4.7)는 '검은 스파르타쿠스'라고 불렸다.
그러나 부정적인 견해도 있었다.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헤겔은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혼란'이라고 평가했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는,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로 스파르타쿠스를 거론하며,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파르타쿠스를 "전체 고대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물','가리발디 와도 비교할 수 없을 위대한 장군이며 고결한 인격'이라고 극찬하며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평했다.

근대 이후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해방을 요구하는 노동자 계급의 상징으로서 사회 주의자·공산주의자 의 우상이 됐다.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통일 운동이 진행되고 있던 이탈리아에서 상기돼, 가리발디 아래에서 통일 전쟁을 위해 싸운 라파엘로 지오바놀리의 영웅 소설 '스파르타쿠스'를 저술, 가리발디가 그 서문을 기고했다. 미국의 노예 해방 운동과 체코의 민족 운동 중에서도 그의 이름이 연상되는 '고대 빈민'을 저술한 미국의 역사 학자 워드는 "저항하는 것은 악이 아니다"라고 노동자 계급에 호소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반전 운동을 전개한 독일 사회 민주당 좌파인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년 8월 13일 ~ 1919년 1월 15일)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정치적 서한'에 '스파르타쿠스'라고 서명하고, 그들의 정치 결사는 '스파르타쿠스단'이라고 했다.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 볼셰비키 권력을 확립한 레닌은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억압된 계급을 옹호하기 위해 일으킨 정의의 전쟁이며 비난할 수 없는 전쟁'이라며 피억압자가 자유를 추구한 최대의 내란이었다고 평가했다.

스탈린 체제 소련에서는 지식인에 의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억압 계급인 노예 소유자와 피억압 계급인 '정치적으로 각성한 노예'라는 계급 투쟁이라고 봤으며,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지배 계급을 타도하려는 혁명 투쟁으로 간주했다. 문화 방면에서도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소재로 한 발레 작품이 만들어져서 1954년 레닌상을 받는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 진영의 연구팀은 공산주의 국가의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연구의 결함을 지적하면서, 고대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현대의 계급 투쟁에 자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판했다. 이 시기의 일련의 노예 반란을 통일적인 노예 폐지 운동이라는 해석을 비판하고, 개인의 봉기는 고립적인 것이며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개인의 자유 획득이 목적이지 그들이 계급 의식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적 사관에서 벗어나면, 스파르타쿠스가 노예 제도의 폐지를 목표로 하고 계급 투쟁을 벌였다는 고전 사료 증거는 없으며 고대 사회에서 노예의 존재는 자명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공산권에서 스파르타쿠스가 높게 평가돼서 냉전 시대 미국은 반대로 경계하고, 적색 공포가 퍼져있던 1951년에 하워드 패스트(Howard Melvin Fast)가 쓴 소설 '스파르타쿠스'는 출판사가 출판을 거부해서 자비로 출판했다.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돼서, 이것을 원작으로 한 대작 영화 '스파르타쿠스 '가 1960년에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상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냉전 종결 후 민족 해방 운동에서도 우상이 됐으며,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의 실질적인 지도자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모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항한 자들의 상징으로 체 게바라와 함께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거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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