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바르카(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 기원전 182년)는 카르타고(Carthago: 티레의 고대 페니키아인이 북아프리카 튀니스만 북쪽
연안에 건설한 국가)의 장군이다.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의 맏아들이며, 한니발이라는 이름은 '바알의 은혜', '자비로운 바알', '우리의 주 바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바르카는 번개라는 뜻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킨 인물이며, 카르타고가 멸망한 뒤에도 로마 사상 가장 강한 적이었다고 후세에 전해진다. 2000년 이상 지난 지금도 한니발의
전술은 연구 대상이며, 각국의 군대 조직에 도움이 될 듯한 전술로 평가가 높다.
한니발의 초상은 튀니지의 5 디나르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
한니발의 초상은 튀니지의 5 디나르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
Le Serment d'Hannibal(?), Ecole française 한니발의 맹세, 프랑스 화파
유년기에서
청년이 되기까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시칠리아를 로마 공화정에 빼앗기자,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이베리아 반도의 식민지 정책에 나선다. 그리고 식민 도시 카르타고
노바를 건설하고, 이베리아인 제부족과 함께 병사를 모아 군대를 양성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니우스(Titus Livius Patavinus)에
따르면, 한니발이 아버지에게 동행을 간청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한니발을 바알 신전으로 데리고 가서 아들에게 평생 로마를 원수로 살 것을 맹세하게
한다.
하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멸망에 집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한니발이 로마에 큰 위협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칸나이 전투 직후처럼 유리한 전황에도 로마와 협상하려 한 적이 여러번 있고 마케도니아와 협정을 맺을때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로마가 멸망하지 않을 것을 혹은 로마가 다시 부활할 것을 전제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심지어 자마 전투 직전까지 한니발은 로마와의 협상을 시도했을 정도.
구체적으로 기록을 보면, 한니발이 로마사절을 만났다는 이유로 의심을 사자(그 유명한 스키피오와의 명장론이 여기서 나왔다.)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내가 어렸을때 아버지와 함께 신전에 가서 영원히 로마와 싸우겠다고 맹세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단지 한니발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며낸 말일 가능성도 있다.
하밀카르가 죽은 뒤, 그의 전우이자 한니발의 매형인 하스드루발 바르카(Hasdrubal Barca)가 히스파니아 사령관이 되고 한니발을 키운다.
한니발은 하스두르발로부터 히스파미아(지금의 이베리아 반도 지역)로 불린다. 이 초청 서신이 카르타고 원로원에도 보내졌고, 이 때 지역 사령관들이 군대 직위가 세습되는 관행을 개탄하며 한니발이 다른 카르타고 젊은이들처럼 카르타고에서 관료 경험을 먼저 쌓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원로원의 동의를 받지 못했고,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에서 군사 경험을 쌓는다.
이 이야기는 조작 의심이 있다. 한니발이 훗날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로 돌아올 때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도시를 떠날 때(하밀카르가 살아있었던)아홉살이었는데, 36년이 지나서야 돌아오는구나.'(Liv.30.37) 즉 한니발은 BC237 하밀카르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떠난 후 BC203년이 되어서야 돌아온 것이다.하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멸망에 집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한니발이 로마에 큰 위협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칸나이 전투 직후처럼 유리한 전황에도 로마와 협상하려 한 적이 여러번 있고 마케도니아와 협정을 맺을때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로마가 멸망하지 않을 것을 혹은 로마가 다시 부활할 것을 전제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심지어 자마 전투 직전까지 한니발은 로마와의 협상을 시도했을 정도.
구체적으로 기록을 보면, 한니발이 로마사절을 만났다는 이유로 의심을 사자(그 유명한 스키피오와의 명장론이 여기서 나왔다.)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내가 어렸을때 아버지와 함께 신전에 가서 영원히 로마와 싸우겠다고 맹세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단지 한니발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며낸 말일 가능성도 있다.
하밀카르가 죽은 뒤, 그의 전우이자 한니발의 매형인 하스드루발 바르카(Hasdrubal Barca)가 히스파니아 사령관이 되고 한니발을 키운다.
한니발은 하스두르발로부터 히스파미아(지금의 이베리아 반도 지역)로 불린다. 이 초청 서신이 카르타고 원로원에도 보내졌고, 이 때 지역 사령관들이 군대 직위가 세습되는 관행을 개탄하며 한니발이 다른 카르타고 젊은이들처럼 카르타고에서 관료 경험을 먼저 쌓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원로원의 동의를 받지 못했고,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에서 군사 경험을 쌓는다.
한니발
전쟁
1. 알프스를 넘다
기원전
221년에 하스드루발이 평소 무시하던 켈트족 노예에게 죽자, 한니발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히스파니아 주둔군 총사령관을 세습받는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전선의 지휘를 맡아, 에브로 강 남쪽 제압에 들어갔다.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와 에브로 강을 경계로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한니발의 힘을 두려워한 로마는 에브로 강 이남에 있는 도시
사군툼(지금의 사군토)과 동맹 관계를 맺고 한니발의 침출을 저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한니발은 사군둠 포위 공격하고 여덟 달 후에 함락시켰다.
로마는 한니발의 행동을 협약 위반으로 규정, 카르타고 정부에게 처벌을 요구했지만 한니발은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어서,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을
처벌할 수 없었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카르타고 노바에서 출발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90,000명(리비아 병사 60,000명, 스페인 병사 30,000명)
기병 12,000명(주로 누미디아 병사) 전투 코끼리 37마리, 그리고 카르타고의 전통대로 장관 이외는 모두 용병으로 구성됐다. 한니발은 에브로
강을 건너서 보병 10,000명, 기병 1,000명을 피레네 산맥에서 에브로 강까지 수비로 남겨두고, 원정을 불안해하던 스페인 병사를
귀환시켰다. 그래서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50,000명, 기병 9,000명, 전투 코끼리 37마리가 됐다. 이들을 데리고 한니발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갔다.
로마는
한니발의 갈리아 침입을 알았지만, 깊은 숲 때문에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한니발은 론 강을 건너고 기병을 먼저 출발시켜, 강 건너편에
있던 갈리아인을 소탕해 방해물을 없앴다. 하지만 희생이 커서 기병이 46,000명까지 줄었고, 전투 코끼리도 7마리 잃었다. 이 도하의
가장자리, 론 강의 하류를 순회하고 있던 한니발 기병 500명은 한니발군을 탐색하던 로마 기병 300명과 싸웠다. 적을 찾고 있던 로마의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가 현지로 달려 갔지만,
한니발은 이미 그가 도착하기 3일 전에 도하를 넘어 알프스 산맥으로 가고 있었다.
한니발의
알프스 산맥 너머의 루트는 상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지금도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다르다. 여하튼, 한니발은 산의 갈리아인들을 놀라게
하려고 전투 코끼리를 선두로 행군했다. 도중에 만난 갈리아인에게는 금품을 주며 로마인은 적이라고 회유했다. 눈이 내릴 정도의 추위와 피로, 좁은
산길과 절벽을 극복하고 한니발 군대는 알프스를 넘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20,000명, 기병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로 진군해서 로마 원로원을 경악시킨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일명 한니발 전쟁,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1년)의
시작이었다.
2.
트레비아 전투 Battle of trebia
로마는
한니발의 공격을 예상했지만, 알프스 산맥을 넘어 침공한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정관 푸블 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즉시 한니발의 움직임을 막기위해 로마 군을 출동시키지만, 티키누스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패배하고 스키피오도 부상 당했다.
로마군의 패배를 보고 주변의 갈리아인 부족은 한니발에게 협력했다. 한니발군은 트레비아 전투에서도 또 한 명의 집정관 티베리우스 샘프로니우스
론구스(Tiberius Sempronius Longus)에게도 이겼다.
3.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 Battle of Lake Trasimene
한니발은
북부 이탈리아에 세력을 구축하면서 기원전 217년 봄에 남하해서 에트루리아에 침입한다. 로마에서 새로운 집정관 그아에누스 세르빌리우스
제미누스(Gnaeus Servilius Geminus)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네포스(Gaius Flaminius Nepos, 기원전 217년
사망)가 다시 한니발의 진로를 막으려고 진군했지만,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에서 두 집정관 전사하고 패배했다. 이 기세를 틈타 로마의 동맹 도시
이반을 촉진하기 위해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마그나 그라이키아)로 향했다.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 도시들이 배반하게 해서 로마를 쉽게
멸망시키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래서 승리로 얻은 로마군 포로는 가혹하게 대했지만, 동맹 도시 포로에게는 잘해주고 로마를 배신하라는 메시지를
주입시켰다. 한편 한니발은 비위생적인 소택지 행군 등으로 전염병을 얻어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로마는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Quintus Fabius Maximus Verrucosus)를 독재관으로 임명한다.
베루코무스는 한니발과 대치하면서 직접 전투는 피한다는 방침이였다. 한편 한니발은 캄파니아로 진군했다. 베루코수스는 한니발 군대에 접근하지만
한니발이 싸우려고 하면 반복해서 물러났다.
4.
칸나에 전투 Battle of Cannae
기원전
216년, 로마의 집정관으로?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Gaius Terentius Varro)와 루시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Lusius
Aemillnus Paullus)가 당선됐다. 베루코수스의 전법이 불만스러웠던 바로는 로마군을 강화하고 동맹 도시에서도 군인을 모집해서,
한니발이 있는 아프리아로 남진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바로의 조급함을 이용해서,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완승한다.
이
전투로 로마병 50,000 ~ 70,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고 한다. 집정관 파울루스와 차기 집정관으로 내정됐던 두 사람이 전사하고
쿠아이스토르(Quaestor: 재무관) 두 사람과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 군사 호민관) 48명도 전사해서, 로마는
전투 한번으로 지도층 25%를 잃는 유례없는 완패에 직면했다. 이 싸움으로 로마는 한니발에 대해 소극적인 전법을 구사하게
된다.
승리한
카르타고 측에서는 여세를 몰아 단숨에 로마를 공략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특히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강하게 진언했는데, 한니발은 공성 병기와
병참이 부족하다며 수도 로마에 진군하지 않고, 로마의 동맹 도시의 배반을 도모할 것을 결정한다. 마하르발은 한니발에게 "당신은 승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활용할 줄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니발은
기원전 216년에 카푸아를, 기원전 212년에 타렌툼을 배신시키고,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 도시를 반란시켰지만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일진일퇴했다.
한니발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동맹 도시와 로마의 유대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니모스(Hieronymus)와 동맹을 맺은
한니발은 카르타고에 보급을 요구했지만, 제해권을 로마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한니발은 카르타고와 연계하기 힘들었다.
5.
로마의 반격
마침내 베르코수스의 전법이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캄파니아 영내에 봉쇄된다. 이에 한니발은 기원전 215년, 안티고노스 왕조 필리포스 5세와도 동맹을 밎고 로마 내외를 압박한다. 그러나 로마는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 봉쇄하면서 해외의 적대 세력을 무력화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11년에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본거지인 이베리아 반도를 공략하고, 또한 그리스의 아에토리아 동맹과 결탁해서, 동방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압박했다.
한니발은 기원전 210년, 아프리아로 진격하지만 타렌툼을 잃는다. 그리고 기원전 208년에 로크리를 공략해서 로마군을 위축시키고,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수스(Marcus Claudius Marcellus. BC 268? BC 208)를 죽였지만 타렌툼의 손실이 크고, 공급이 불안해서 한니발의 행동 지역은 제한된다. 또한 로마가 루카니아 지방, 삼니움 지방을 되찾아서,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은 전략적 주도권을 잃는다.
기원전 207년 한니발은 다시 북상해서 아프리아 지방을 제압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진하는 동생 하스드루발의 지원을 기다렸지만, 하스드루발은 도중에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사한다. 또한 한니발과 함께 행동하던 동생 마고의 리구리아 공략 실패, 필리포스 5세와의 연계 실패 등으로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주도권을 영영 잃는다.
한니발이 아프리아 지방에서 고전하는 가운데, 로마는 히스파니아에서 공적을 올린 스키피오는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고, 그 곳을 거점으로 지원병을 모집/양성했지만 칸나에 전투의 실패 때문에 원로원은 스키피오의 에게도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원로원의 승인(사실은 묵인이며, 스키피오에 대한 지원·원군은 약속되지 않았다고) 받은 스키피오는 군대와 함께 아프리카로 도항을 떠난다.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을 무시하고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놀랐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왕국 기병을 원군으로 싸우지만 패배했다.
이 패전에 놀란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 소환을 조건으로 로마와 휴전하려고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수십년만에 고국 카르타고로 돌아가게 된다.
마침내 베르코수스의 전법이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캄파니아 영내에 봉쇄된다. 이에 한니발은 기원전 215년, 안티고노스 왕조 필리포스 5세와도 동맹을 밎고 로마 내외를 압박한다. 그러나 로마는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 봉쇄하면서 해외의 적대 세력을 무력화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11년에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본거지인 이베리아 반도를 공략하고, 또한 그리스의 아에토리아 동맹과 결탁해서, 동방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압박했다.
한니발은 기원전 210년, 아프리아로 진격하지만 타렌툼을 잃는다. 그리고 기원전 208년에 로크리를 공략해서 로마군을 위축시키고,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수스(Marcus Claudius Marcellus. BC 268? BC 208)를 죽였지만 타렌툼의 손실이 크고, 공급이 불안해서 한니발의 행동 지역은 제한된다. 또한 로마가 루카니아 지방, 삼니움 지방을 되찾아서,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은 전략적 주도권을 잃는다.
기원전 207년 한니발은 다시 북상해서 아프리아 지방을 제압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진하는 동생 하스드루발의 지원을 기다렸지만, 하스드루발은 도중에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사한다. 또한 한니발과 함께 행동하던 동생 마고의 리구리아 공략 실패, 필리포스 5세와의 연계 실패 등으로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주도권을 영영 잃는다.
한니발이 아프리아 지방에서 고전하는 가운데, 로마는 히스파니아에서 공적을 올린 스키피오는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고, 그 곳을 거점으로 지원병을 모집/양성했지만 칸나에 전투의 실패 때문에 원로원은 스키피오의 에게도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원로원의 승인(사실은 묵인이며, 스키피오에 대한 지원·원군은 약속되지 않았다고) 받은 스키피오는 군대와 함께 아프리카로 도항을 떠난다.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을 무시하고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놀랐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왕국 기병을 원군으로 싸우지만 패배했다.
이 패전에 놀란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 소환을 조건으로 로마와 휴전하려고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수십년만에 고국 카르타고로 돌아가게 된다.
6.
자마 전투 Battle of Zama
스키피오는 앞으로 대규모 작전에서 누미디아 왕 슈 시팍스(Syphax)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로마 측에 붙어 있던 마시니사를 누미디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기병 병력을 누미디아에 의존하고 있던 카르타고군은 로마에 대한 기병의 우위를 잃었다. 한니발은 이런 상황에서협상하기 위해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대치하는 양군 앞에서 스키피오와 회견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로마와 카르타고는 상호 불가침과 지중해를 경계로 해서 북쪽을 로마 영토로, 남쪽을 카르타고 영토로 하자는 휴전 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이번 전쟁은 한니발의 사군툼 침략이 발단이기 때문에 로마인은 카르타고인을 믿을 수 없다고 거부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지만 협상은 결렬됐다.
스키피오는 앞으로 대규모 작전에서 누미디아 왕 슈 시팍스(Syphax)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로마 측에 붙어 있던 마시니사를 누미디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기병 병력을 누미디아에 의존하고 있던 카르타고군은 로마에 대한 기병의 우위를 잃었다. 한니발은 이런 상황에서협상하기 위해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대치하는 양군 앞에서 스키피오와 회견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로마와 카르타고는 상호 불가침과 지중해를 경계로 해서 북쪽을 로마 영토로, 남쪽을 카르타고 영토로 하자는 휴전 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이번 전쟁은 한니발의 사군툼 침략이 발단이기 때문에 로마인은 카르타고인을 믿을 수 없다고 거부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지만 협상은 결렬됐다.
자마
전투는 지금까지의 한니발의 전투와 달리 보병은 카르타고가 유리했지만 기병은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니발은 선두에 코끼리를 배치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경장 보병으로 편성된 보병 중대를 넓은 간격으로 배치해서, 직진 밖에 할 수 없는 코끼리를 무력화시켰다. 큰 집단의 조밀한 중장
보병이 중심이었던 카르타고군은 로마 기병의 기동력에 의해 후방에서 공격 당하며, 전면에서는 로마 보병에게 포위당해 참패했다. 그렇게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우위를 잃고,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했다.
전쟁이
끝난 뒤
1. 카르타고의 재건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동맹을 강요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부과했다. 그때까지 카르타고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귀족들이 권세를 잃어, 한니발은 패배했지만 복귀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앞장서서 카르타고의 재건을 도모했다.
한니발은 행정의 수장인 수펫(sufet)이 돼서, 명예직에 불과한 수펫의 권한을 회복하고 카르타고의 행정 모체인 '104인 위원회'의 개혁에 착수한다. 직접 선거에 의해 의원을 임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민중의 지지를 배경으로 의원의 임기를 종신에서 2년으로 바꿨다. 한니발의 개혁은 효과를 거둬서, 배상금을 모두 지불하고 군인으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능력을 보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동맹을 강요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부과했다. 그때까지 카르타고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귀족들이 권세를 잃어, 한니발은 패배했지만 복귀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앞장서서 카르타고의 재건을 도모했다.
한니발은 행정의 수장인 수펫(sufet)이 돼서, 명예직에 불과한 수펫의 권한을 회복하고 카르타고의 행정 모체인 '104인 위원회'의 개혁에 착수한다. 직접 선거에 의해 의원을 임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민중의 지지를 배경으로 의원의 임기를 종신에서 2년으로 바꿨다. 한니발의 개혁은 효과를 거둬서, 배상금을 모두 지불하고 군인으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능력을 보였다.
2. 한니발의 시리아 망명
한니발이 배상금을 상환한 것이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Marcus Porcius Cato Censorius)를 비롯한 로마의 반카르타고파의 위기감을 부추겼다.
또 한니발의 개혁은 효과적이었지만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카르타고 국내의 반한니발파도 격화된다. 반한니발파는 '한니발이 시리아(셀레우코스 왕조)와 내통하고 있다'고 로마에 통보해서, 로마는 조사단을 보내기로 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탈출,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3 세(Antiochos III)에게 갔다. 한니발이 정말 내통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니발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의 군사 고문이 돼서 의견을 진언하고, 시리아가 로마와 전쟁할 때 시리아군의 참모 중 1명이 돼서 로마와 대치하지만, 젊은 지휘관과 왕이 꺼려서 의견은 채택되지 않고 에우류메돈 강 싸움 에서 패배한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왕조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안티오코스 3세는 항복했다. 이 때의 로마는 한니발과 싸워서 한니발의 포위 섬멸 전술을 익혔고, 마케도니아 전쟁과 로마 VS 시리아 전쟁에서 완승할 정도로 막강한 존재가 돼있었다.
3. 한니발의 최후
한니발은 시리아 전쟁이 끝난 뒤, 로마의 추격을 피해 흑해 연안의 비티니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로마도 한니발이 비티니아로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로원의 사자로서 비티니아를 방문한 티투스 퀸투스 플라미니우스(Titus Quinctius Flamininus)가 비티니아 왕 프루시아스 1세(Prusias I)에게 한니발의 신병을 인도하도록 했다. 한니발은 이것을 알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기원전 183년 ~ 기원전 182년에 자살한다. 노예에게 교살하도록 했다고도 전해지고, 반지에 숨겨둔 독약을 마셨다고도 한다.
Hannibal Barca counting the rings of the Roman knights killed at the Battle of Cannae, for Versailles, 1704
일화와 사후 평가
자마
전투로부터 몇 년 뒤, 한니발이 에베소에 망명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에베소를 방문한 스키피오와 재회해서 잠시 대화했다고 하는데, 스키피오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이 대답했다.
"첫번째는 알렉산더 대왕, 둘째는 피로스(에페이로스 왕). 그리고 셋째는 나다"
스키피오는 이에
"자마 전투에서 당신이 나를 쓰러뜨렸다면?"
하고 묻자 한니발이 대답했다.
"알렉산더를 넘어서 내가 사상 최고의 지휘관이 됐겠지."
"첫번째는 알렉산더 대왕, 둘째는 피로스(에페이로스 왕). 그리고 셋째는 나다"
스키피오는 이에
"자마 전투에서 당신이 나를 쓰러뜨렸다면?"
하고 묻자 한니발이 대답했다.
"알렉산더를 넘어서 내가 사상 최고의 지휘관이 됐겠지."
한니발이 이용한 포위 섬멸 전술은 현대의 육군 사관학교에서도 반드시 교재로 사용될만큼 완성도 높다. 또한 리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한니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떤 강대국이라도, 오랜 시간 평화가 계속될 수 없다. 외국에 적이 없어도 국내에 적이 생긴다. 외부의 적을 불허하는 튼튼한 자신의 육체도 신체 내부의 질환으로 고통받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수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니발 전용 수컷 코끼리는 다른 코끼리들보다 몸집이 크고 강했다. 학자들은 인도 코끼리라고 추정한다. 이 코끼리는 주인처럼 애꾸에 한쪽 상아가 없었다.
훗날 로마는 왜 처음에 사군툼에 원군을 안보내서 이탈리아를 전장으로 만들었는지 후회했다고 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게 위협을 받아 로마에 원군을 요청했다. 민회는 부정적이었으나 한 원로원이 "진즉에 사군툼에 원군을 보냈으면 이탈리아에서 고생하지 않았을 거요.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겁니까?"하고 말해서 결국 그리스로 원군을 보낸다. 그리고 해당되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한니발 전쟁에서 마케도니아를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동맹국들이라 외면할 수 없었다.
한니발은
로마 사상 최강의 적으로 로마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한니발에 관한 기록 대부분이 후대 로마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서,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냉정하고 무서운 장군으로 묘사돼 있다. 많은 기록은 그를 잔인하다고 묘사했으며, 티투스 리비우스나 키세로도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어느 로마 집정관은 사절을 만난 뒤 한니발과 그의 군대를 설명하면서, 다리와 진영을 건설할 때 전사자의 시체로 만들고, 배고프면 전사자의 고기를
먹는 매우 무시무시한 집단이라는 묘사를 하기도 하였는데(Savage and barbarous by nature and habit, their
general has made them still more brutal by building up bridges and barriers with
human bodies and - I shudder to say it - teaching them to feed on human flesh -
Livy 23.5)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후세의 로마인들은 로마가 더 강해지도록 일조한 적으로서 한니발을 경외하기도 했고, 한니발 동상을 도심에 건립하기도 했다고 한다.
라틴어로는 <한니발이 문 앞에 있다(Hannibal erat ad portas)>,라는 말이 '위험이 임박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아이가 나쁜 짓을 하면 "한니발이 와서 너를 데려가 버린다"고 꾸짖을 때도 있다. 한편, 로마에 억압당한 국가에서는 한니발을 영웅으로 칭송할 때도 있다.
후세의 로마인들은 로마가 더 강해지도록 일조한 적으로서 한니발을 경외하기도 했고, 한니발 동상을 도심에 건립하기도 했다고 한다.
라틴어로는 <한니발이 문 앞에 있다(Hannibal erat ad portas)>,라는 말이 '위험이 임박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아이가 나쁜 짓을 하면 "한니발이 와서 너를 데려가 버린다"고 꾸짖을 때도 있다. 한편, 로마에 억압당한 국가에서는 한니발을 영웅으로 칭송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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