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23, 2015

November 2015 Paris attacks 파리 테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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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15 Paris attacks 파리 테러 사건

Attentats du 13 novembre 2015 en Île-de-France


공포


파리의 대학살


파리 시내에서의 전쟁


1. 프랑스 파리 테러 사건의 전체적 상황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사건 이후로 또 한번 대형 테러 대상이 된 사건이다.
파리 시내 7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테러가 발생해서 테러범 8명을 제외한 132명이 사망했다.

프랑스 시간 21시 20분, 파리 10구의 르 카리용(Le Carillon)이라는 술집에서 가장 먼저 총기 난사가 발생했다. 테러범은 여기에서 이동해서 길 건너 캄보디아 레스토랑 르 프티 캉보주(Le Petit Cambodge)로 이동해서 다시 총기를 난사했다. 비슷한 시간에 여기서 약간 떨어진 피자리아 라 카사 노스트라(La Casa Nostra)에서도 기관총 난사가 있었다. 술집과 식당에서 최소 12명이 사망했으며, 피자리아에서 시체를 최소 5구 봤다는 증언이 있다.




프랑스 시간 21시 30분, 스타드 드 프랑스(Stade de France)에서는 프랑스와 독일 축구 국가 대표팀의 친선 경기 중이었다.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관람 중이던 스타드 드 프랑스 밖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3번 있었다. 시합 중계 중이던 TF1의 중계 영상에 전반 16분, 19분에 2번 폭발음이 녹음됐다.
나중에 축구장에 테러범이 진입하려고 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테러범은 시합 시작 약 15분 후 집입하려다가 몸 수색으로 발각됐고, 조끼를 터뜨려 자폭했다. 축구장에서는 이것으로 민간인이 1명 사망했다.
축구 시합은 끝까지 진행됐지만(프랑스가 2:0으로 이겼다) 연쇄 테러 우려로 일부 관중은 축구장을 떠나지 않고 그라운드 안으로 대피했다.



프랑스 시간 9시 40분 무렵, 미국 밴드 '이글스 오브 데스 메탈'이 파리 11구 바타클랑(Bataclan) 콘서트장에서 공연하고 있었다. 1500명쯤 되는 관객들이 콘서트장에 있었다. 
공연 시작 후 45~50분쯤 지났을 때 복면을 두른 4명이 검은 폭스바겐 폴로 자동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공연장으로 들어와 AK-47을 난사했고 수류탄을 던졌다. 목격자의 발언에 의하면 테러범 중 1명이 "알라는 위대하다!(الله أكبر, 알라후 아크바르) 시리아를 위해"를 외쳤다고 하며, 그리고 "너희가 우리 형제들을 시리아에서 죽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곳에 왔다"고 말했다. 그 직후, 인질극이 일어났다.
테러리스트들은 사람들에게 움직이면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휴대폰이 울리거나 움직임이 포착되면 사살했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거의 15초 간격으로 총성이 1발씩 들렸다고 한다.
셀리아와 함께 온 뱅자맹 카즈노브는 인질로 잡혀있을 무렵 페이스북에 "난 아직 바타클랑에 있다. 안에 생존자들이 있다. 그들이 모두를 죽이고 있다. 한 명씩 한 명씩. 곧 1층이다!"라고 구조를 요청했다.
공연장에 갇혀 있던 관객들이 모두 안전하게 대피한 것은 2시간 30여 분이 지난 이튿날, 0시 20분에 경찰이 와서 테러범이 자폭한 이후다.




프랑스 시간 21시 50분, 2명이 파리 11구에 있는 카페 '르 벨 에키프(Le Belle Equipe)'에서 총기를 난사했다. 이곳에서 최소 19명이 사망했다.


 

현지 시각 22시, 파리 11구 바타클랑(Bataclan) 콘서트장에서 미국 밴드 'Eagles Of Death Metal'의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그 때 복면의 괴한 4명이 들어와서 AK-47를 난사했다. 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수류탄도 던졌다.

프랑스 시간 0시경,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 솅겐조약(Schengen Agreement: EU 회원국 간에 체결된 국경 개방 조약)을 일시 정지하고 국경 통제를 강화했다. 또 G20 정상회의 참석도 취소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November 2015 Paris attacks를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공격"이라고 말했다.

현지 시각 0시 15분경, 테러리스트들이 바타클랑 콘서트장에서 인질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대테러부대가 투입됐다. 상황은 현지 시각 1시경에 끝났지만, 사망자가 약 100명이었다. 테러리스트 3명은 자폭했다.

프랑스 시간 10시경, 대통령이 프랑스 파리 테러는 IS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프랑스 시간 11시경 IS가 프랑스 파리 테러는 IS의 소행이라고 말했다.



2. 수사

프랑스 경찰은 이번 테러를 모의·지원한 혐의로 벨기에 태생 프랑스인 살라 압데슬람(Sala Abdeslam. 26)을 추적 중이라고 발표했다. 벨기에 검찰도 브뤼셀에 거주하는 살라 압데슬람과 벨기에에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활동 거점인 몰렌벡에 거주하는 비랄 하드피(Bilal Hadfi, 20)가 파리 테러에 연루됐다고 발표했으며, 프랑스 시간 13일 파리 테러의 총책임자로 압델하미드 아바우드(Abdel-Hamid Adu Oud, 27)를 지목했다.

양국 경찰은 압데슬람 형제 중 하나가 바타클랑 콘서트홀에서 자폭했으며, 살라 압데슬람은 범행에 사용된 검은색 폭스바겐을 구입하고 테러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했다고 말했다. 압데슬람 3형제 중 나머지 1명은 벨기에에서 체포됐다고 한다.

프랑스 경찰은 테러의 총책임자 압델하미드 아바우드, 도주한 살라 압데슬람, 9번째 용의자 등이 생드니에 은신해 있다는 정보를 확보하고 7시간 동안 진압했다. 총격전으로 2명이 죽고, 8명을 체포했다. 프랑스 경찰은 현지 시간으로 19일, 사망한 한명이 압델하미드 아바우드라고 발표했다.

경찰은 또한 테러범들에게 폭탄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되는 'Mohammed K'도 수배했다.




3. 프랑스 파리 테러 주동자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 Abu Bakr al-Baghdadi: 배후. 1971년생. 44세. IS의 수괴. 서양에 대한 보복을 지시.
압델 하미드 아바우드 Abdel-Hamid Adu Oud: 1988년생. 27세. ISIS 고위 간부로 November 2015 Paris attacks을 기획하고 지시했다. 테러 하루 후 생드니 지역에 은신했다가 경찰 저격수에게 사살됐다.
파비앵 클랑 Fabien Clain: 1978년생. 37세. 1990년대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프랑스인. November 2015 Paris attacks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주장한 ISIS의 프랑스어 메시지를 녹음했으며, ISIS에서 850명에 달하는 프랑스·벨기에 출신 전투원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스마엘 오마르 모스테파이 Ismael Omar Mostefai: 1985년생. 30세. 테러 실행. November 2015 Paris attacks의 주요 용의자로 범행 현장에서 자폭.
살라 압데슬람 Sala Abdeslam: 1989년생. 26세. 테러 실행. 도주 중.
이브라힘 압데슬람 Ibrahim Abdeslam: 1984년생. 31세. 테러 실행. 프랑스 파리 테러 현장에서 자폭.
빌랄 하드피 Bilal Hadfi: 1995년생. 20세. 테러 실행. 스타드 드 프랑스 경기장에서 자폭.
사미 아미무르 Sami Amimur: 1987년생. 28세. 테러 실행. 바타클랑 공연장에서 89명을 죽인 자폭테러범 4명 중 1명. 자폭. 
아흐마드 알 무하마드 Ahmad Al-Mohammad: 1990년생. 25세 난민. 테러 실행. 자폭.
기타 신상이 밝혀지지 않은 2명 - 20대에서 30대로 추정. 테러 가담. 사살 혹은 자폭. 

Monday, November 9, 2015

The Life of Hannibal Barca, and battle 한니발 바르카의 생애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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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바르카(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 기원전 182년)는 카르타고(Carthago: 티레의 고대 페니키아인이 북아프리카 튀니스만 북쪽 연안에 건설한 국가)의 장군이다.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의 맏아들이며, 한니발이라는 이름은 '바알의 은혜', '자비로운 바알', '우리의 주 바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바르카는 번개라는 뜻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킨 인물이며, 카르타고가 멸망한 뒤에도 로마 사상 가장 강한 적이었다고 후세에 전해진다. 2000년 이상 지난 지금도 한니발의 전술은 연구 대상이며, 각국의 군대 조직에 도움이 될 듯한 전술로 평가가 높다.
한니발의 초상은 튀니지의 5 디나르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


Le Serment d'Hannibal(?), Ecole française 한니발의 맹세, 프랑스 화파

유년기에서 청년이 되기까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시칠리아를 로마 공화정에 빼앗기자,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이베리아 반도의 식민지 정책에 나선다. 그리고 식민 도시 카르타고 노바를 건설하고, 이베리아인 제부족과 함께 병사를 모아 군대를 양성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니우스(Titus Livius Patavinus)에 따르면, 한니발이 아버지에게 동행을 간청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한니발을 바알 신전으로 데리고 가서 아들에게 평생 로마를 원수로 살 것을 맹세하게 한다.
하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멸망에 집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한니발이 로마에 큰 위협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칸나이 전투 직후처럼 유리한 전황에도 로마와 협상하려 한 적이 여러번 있고 마케도니아와 협정을 맺을때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로마가 멸망하지 않을 것을 혹은 로마가 다시 부활할 것을 전제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심지어 자마 전투 직전까지 한니발은 로마와의 협상을 시도했을 정도.
구체적으로 기록을 보면, 한니발이 로마사절을 만났다는 이유로 의심을 사자(그 유명한 스키피오와의 명장론이 여기서 나왔다.)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내가 어렸을때 아버지와 함께 신전에 가서 영원히 로마와 싸우겠다고 맹세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단지 한니발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며낸 말일 가능성도 있다.
하밀카르가 죽은 뒤, 그의 전우이자 한니발의 매형인 하스드루발 바르카(Hasdrubal Barca)가 히스파니아 사령관이 되고 한니발을 키운다.
한니발은 하스두르발로부터 히스파미아(지금의 이베리아 반도 지역)로 불린다. 이 초청 서신이 카르타고 원로원에도 보내졌고, 이 때 지역 사령관들이 군대 직위가 세습되는 관행을 개탄하며 한니발이 다른 카르타고 젊은이들처럼 카르타고에서 관료 경험을 먼저 쌓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원로원의 동의를 받지 못했고,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에서 군사 경험을 쌓는다.
이 이야기는 조작 의심이 있다. 한니발이 훗날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로 돌아올 때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도시를 떠날 때(하밀카르가 살아있었던)아홉살이었는데, 36년이 지나서야 돌아오는구나.'(Liv.30.37) 즉 한니발은 BC237 하밀카르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떠난 후 BC203년이 되어서야 돌아온 것이다.

Hannibal passant les Alpes, Bénédict Masson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는 한니발 장군, 베네딕트 마송


한니발 전쟁

1. 알프스를 넘다
기원전 221년에 하스드루발이 평소 무시하던 켈트족 노예에게 죽자, 한니발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히스파니아 주둔군 총사령관을 세습받는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전선의 지휘를 맡아, 에브로 강 남쪽 제압에 들어갔다.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와 에브로 강을 경계로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한니발의 힘을 두려워한 로마는 에브로 강 이남에 있는 도시 사군툼(지금의 사군토)과 동맹 관계를 맺고 한니발의 침출을 저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한니발은 사군둠 포위 공격하고 여덟 달 후에 함락시켰다. 로마는 한니발의 행동을 협약 위반으로 규정, 카르타고 정부에게 처벌을 요구했지만 한니발은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어서,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을 처벌할 수 없었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카르타고 노바에서 출발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90,000명(리비아 병사 60,000명, 스페인 병사 30,000명) 기병 12,000명(주로 누미디아 병사) 전투 코끼리 37마리, 그리고 카르타고의 전통대로 장관 이외는 모두 용병으로 구성됐다. 한니발은 에브로 강을 건너서 보병 10,000명, 기병 1,000명을 피레네 산맥에서 에브로 강까지 수비로 남겨두고, 원정을 불안해하던 스페인 병사를 귀환시켰다. 그래서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50,000명, 기병 9,000명, 전투 코끼리 37마리가 됐다. 이들을 데리고 한니발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갔다.
로마는 한니발의 갈리아 침입을 알았지만, 깊은 숲 때문에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한니발은 론 강을 건너고 기병을 먼저 출발시켜, 강 건너편에 있던 갈리아인을 소탕해 방해물을 없앴다. 하지만 희생이 커서 기병이 46,000명까지 줄었고, 전투 코끼리도 7마리 잃었다. 이 도하의 가장자리, 론 강의 하류를 순회하고 있던 한니발 기병 500명은 한니발군을 탐색하던 로마 기병 300명과 싸웠다. 적을 찾고 있던 로마의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가 현지로 달려 갔지만, 한니발은 이미 그가 도착하기 3일 전에 도하를 넘어 알프스 산맥으로 가고 있었다.
한니발의 알프스 산맥 너머의 루트는 상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지금도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다르다. 여하튼, 한니발은 산의 갈리아인들을 놀라게 하려고 전투 코끼리를 선두로 행군했다. 도중에 만난 갈리아인에게는 금품을 주며 로마인은 적이라고 회유했다. 눈이 내릴 정도의 추위와 피로, 좁은 산길과 절벽을 극복하고 한니발 군대는 알프스를 넘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20,000명, 기병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로 진군해서 로마 원로원을 경악시킨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일명 한니발 전쟁,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1년)의 시작이었다.

2. 트레비아 전투 Battle of trebia
로마는 한니발의 공격을 예상했지만, 알프스 산맥을 넘어 침공한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정관 푸블 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즉시 한니발의 움직임을 막기위해 로마 군을 출동시키지만, 티키누스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패배하고 스키피오도 부상 당했다. 로마군의 패배를 보고 주변의 갈리아인 부족은 한니발에게 협력했다. 한니발군은 트레비아 전투에서도 또 한 명의 집정관 티베리우스 샘프로니우스 론구스(Tiberius Sempronius Longus)에게도 이겼다.

3.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 Battle of Lake Trasimene
한니발은 북부 이탈리아에 세력을 구축하면서 기원전 217년 봄에 남하해서 에트루리아에 침입한다. 로마에서 새로운 집정관 그아에누스 세르빌리우스 제미누스(Gnaeus Servilius Geminus)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네포스(Gaius Flaminius Nepos, 기원전 217년 사망)가 다시 한니발의 진로를 막으려고 진군했지만,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에서 두 집정관 전사하고 패배했다. 이 기세를 틈타 로마의 동맹 도시 이반을 촉진하기 위해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마그나 그라이키아)로 향했다.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 도시들이 배반하게 해서 로마를 쉽게 멸망시키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래서 승리로 얻은 로마군 포로는 가혹하게 대했지만, 동맹 도시 포로에게는 잘해주고 로마를 배신하라는 메시지를 주입시켰다. 한편 한니발은 비위생적인 소택지 행군 등으로 전염병을 얻어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로마는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Quintus Fabius Maximus Verrucosus)를 독재관으로 임명한다. 베루코무스는 한니발과 대치하면서 직접 전투는 피한다는 방침이였다. 한편 한니발은 캄파니아로 진군했다. 베루코수스는 한니발 군대에 접근하지만 한니발이 싸우려고 하면 반복해서 물러났다.

4. 칸나에 전투 Battle of Cannae
기원전 216년, 로마의 집정관으로?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Gaius Terentius Varro)와 루시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Lusius Aemillnus Paullus)가 당선됐다. 베루코수스의 전법이 불만스러웠던 바로는 로마군을 강화하고 동맹 도시에서도 군인을 모집해서, 한니발이 있는 아프리아로 남진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바로의 조급함을 이용해서,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완승한다.
이 전투로 로마병 50,000 ~ 70,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고 한다. 집정관 파울루스와 차기 집정관으로 내정됐던 두 사람이 전사하고 쿠아이스토르(Quaestor: 재무관) 두 사람과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 군사 호민관) 48명도 전사해서, 로마는 전투 한번으로 지도층 25%를 잃는 유례없는 완패에 직면했다. 이 싸움으로 로마는 한니발에 대해 소극적인 전법을 구사하게 된다.
승리한 카르타고 측에서는 여세를 몰아 단숨에 로마를 공략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특히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강하게 진언했는데, 한니발은 공성 병기와 병참이 부족하다며 수도 로마에 진군하지 않고, 로마의 동맹 도시의 배반을 도모할 것을 결정한다. 마하르발은 한니발에게 "당신은 승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활용할 줄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니발은 기원전 216년에 카푸아를, 기원전 212년에 타렌툼을 배신시키고,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 도시를 반란시켰지만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일진일퇴했다. 한니발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동맹 도시와 로마의 유대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니모스(Hieronymus)와 동맹을 맺은 한니발은 카르타고에 보급을 요구했지만, 제해권을 로마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한니발은 카르타고와 연계하기 힘들었다.

5. 로마의 반격
마침내 베르코수스의 전법이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캄파니아 영내에 봉쇄된다. 이에 한니발은 기원전 215년, 안티고노스 왕조 필리포스 5세와도 동맹을 밎고 로마 내외를 압박한다. 그러나 로마는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 봉쇄하면서 해외의 적대 세력을 무력화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11년에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본거지인 이베리아 반도를 공략하고, 또한 그리스의 아에토리아 동맹과 결탁해서, 동방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압박했다.
한니발은 기원전 210년, 아프리아로 진격하지만 타렌툼을 잃는다. 그리고 기원전 208년에 로크리를 공략해서 로마군을 위축시키고,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수스(Marcus Claudius Marcellus. BC 268? BC 208)를 죽였지만 타렌툼의 손실이 크고, 공급이 불안해서 한니발의 행동 지역은 제한된다. 또한 로마가 루카니아 지방, 삼니움 지방을 되찾아서,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은 전략적 주도권을 잃는다.
기원전 207년 한니발은 다시 북상해서 아프리아 지방을 제압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진하는 동생 하스드루발의 지원을 기다렸지만, 하스드루발은 도중에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사한다. 또한 한니발과 함께 행동하던 동생 마고의 리구리아 공략 실패, 필리포스 5세와의 연계 실패 등으로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주도권을 영영 잃는다.
한니발이 아프리아 지방에서 고전하는 가운데, 로마는 히스파니아에서 공적을 올린 스키피오는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고, 그 곳을 거점으로 지원병을 모집/양성했지만 칸나에 전투의 실패 때문에 원로원은 스키피오의 에게도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원로원의 승인(사실은 묵인이며, 스키피오에 대한 지원·원군은 약속되지 않았다고) 받은 스키피오는 군대와 함께 아프리카로 도항을 떠난다.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을 무시하고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놀랐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왕국 기병을 원군으로 싸우지만 패배했다.
이 패전에 놀란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 소환을 조건으로 로마와 휴전하려고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수십년만에 고국 카르타고로 돌아가게 된다.

6. 자마 전투 Battle of Zama
스키피오는 앞으로 대규모 작전에서 누미디아 왕 슈 시팍스(Syphax)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로마 측에 붙어 있던 마시니사를 누미디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기병 병력을 누미디아에 의존하고 있던 카르타고군은 로마에 대한 기병의 우위를 잃었다. 한니발은 이런 상황에서협상하기 위해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대치하는 양군 앞에서 스키피오와 회견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로마와 카르타고는 상호 불가침과 지중해를 경계로 해서 북쪽을 로마 영토로, 남쪽을 카르타고 영토로 하자는 휴전 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이번 전쟁은 한니발의 사군툼 침략이 발단이기 때문에 로마인은 카르타고인을 믿을 수 없다고 거부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지만 협상은 결렬됐다.
자마 전투는 지금까지의 한니발의 전투와 달리 보병은 카르타고가 유리했지만 기병은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니발은 선두에 코끼리를 배치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경장 보병으로 편성된 보병 중대를 넓은 간격으로 배치해서, 직진 밖에 할 수 없는 코끼리를 무력화시켰다. 큰 집단의 조밀한 중장 보병이 중심이었던 카르타고군은 로마 기병의 기동력에 의해 후방에서 공격 당하며, 전면에서는 로마 보병에게 포위당해 참패했다. 그렇게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우위를 잃고,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했다.


전쟁이 끝난 뒤
1. 카르타고의 재건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동맹을 강요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부과했다. 그때까지 카르타고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귀족들이 권세를 잃어, 한니발은 패배했지만 복귀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앞장서서 카르타고의 재건을 도모했다.
한니발은 행정의 수장인 수펫(sufet)이 돼서, 명예직에 불과한 수펫의 권한을 회복하고 카르타고의 행정 모체인 '104인 위원회'의 개혁에 착수한다. 직접 선거에 의해 의원을 임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민중의 지지를 배경으로 의원의 임기를 종신에서 2년으로 바꿨다. 한니발의 개혁은 효과를 거둬서, 배상금을 모두 지불하고 군인으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능력을 보였다.

2. 한니발의 시리아 망명
한니발이 배상금을 상환한 것이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Marcus Porcius Cato Censorius)를 비롯한 로마의 반카르타고파의 위기감을 부추겼다.
또 한니발의 개혁은 효과적이었지만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카르타고 국내의 반한니발파도 격화된다. 반한니발파는 '한니발이 시리아(셀레우코스 왕조)와 내통하고 있다'고 로마에 통보해서, 로마는 조사단을 보내기로 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탈출,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3 세(Antiochos III)에게 갔다. 한니발이 정말 내통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니발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의 군사 고문이 돼서 의견을 진언하고, 시리아가 로마와 전쟁할 때 시리아군의 참모 중 1명이 돼서 로마와 대치하지만, 젊은 지휘관과 왕이 꺼려서 의견은 채택되지 않고 에우류메돈 강 싸움 에서 패배한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왕조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안티오코스 3세는 항복했다. 이 때의 로마는 한니발과 싸워서 한니발의 포위 섬멸 전술을 익혔고, 마케도니아 전쟁과 로마 VS 시리아 전쟁에서 완승할 정도로 막강한 존재가 돼있었다.

3. 한니발의 최후
한니발은 시리아 전쟁이 끝난 뒤, 로마의 추격을 피해 흑해 연안의 비티니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로마도 한니발이 비티니아로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로원의 사자로서 비티니아를 방문한 티투스 퀸투스 플라미니우스(Titus Quinctius Flamininus)가 비티니아 왕 프루시아스 1세(Prusias I)에게 한니발의 신병을 인도하도록 했다. 한니발은 이것을 알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기원전 183년 ~ 기원전 182년에 자살한다. 노예에게 교살하도록 했다고도 전해지고, 반지에 숨겨둔 독약을 마셨다고도 한다.

Hannibal Barca counting the rings of the Roman knights killed at the Battle of Cannae, for Versailles, 1704

일화와 사후 평가
자마 전투로부터 몇 년 뒤, 한니발이 에베소에 망명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에베소를 방문한 스키피오와 재회해서 잠시 대화했다고 하는데, 스키피오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이 대답했다.
"첫번째는 알렉산더 대왕, 둘째는 피로스(에페이로스 왕). 그리고 셋째는 나다"
스키피오는 이에
"자마 전투에서 당신이 나를 쓰러뜨렸다면?"
하고 묻자 한니발이 대답했다.
"알렉산더를 넘어서 내가 사상 최고의 지휘관이 됐겠지."

한니발이 이용한 포위 섬멸 전술은 현대의 육군 사관학교에서도 반드시 교재로 사용될만큼 완성도 높다. 또한 리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한니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떤 강대국이라도, 오랜 시간 평화가 계속될 수 없다. 외국에 적이 없어도 국내에 적이 생긴다. 외부의 적을 불허하는 튼튼한 자신의 육체도 신체 내부의 질환으로 고통받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수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니발 전용 수컷 코끼리는 다른 코끼리들보다 몸집이 크고 강했다. 학자들은 인도 코끼리라고 추정한다. 이 코끼리는 주인처럼 애꾸에 한쪽 상아가 없었다.

훗날 로마는 왜 처음에 사군툼에 원군을 안보내서 이탈리아를 전장으로 만들었는지 후회했다고 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게 위협을 받아 로마에 원군을 요청했다. 민회는 부정적이었으나 한 원로원이 "진즉에 사군툼에 원군을 보냈으면 이탈리아에서 고생하지 않았을 거요.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겁니까?"하고 말해서 결국 그리스로 원군을 보낸다. 그리고 해당되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한니발 전쟁에서 마케도니아를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동맹국들이라 외면할 수 없었다.

한니발은 로마 사상 최강의 적으로 로마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한니발에 관한 기록 대부분이 후대 로마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서,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냉정하고 무서운 장군으로 묘사돼 있다. 많은 기록은 그를 잔인하다고 묘사했으며, 티투스 리비우스나 키세로도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어느 로마 집정관은 사절을 만난 뒤 한니발과 그의 군대를 설명하면서, 다리와 진영을 건설할 때 전사자의 시체로 만들고, 배고프면 전사자의 고기를 먹는 매우 무시무시한 집단이라는 묘사를 하기도 하였는데(Savage and barbarous by nature and habit, their general has made them still more brutal by building up bridges and barriers with human bodies and - I shudder to say it - teaching them to feed on human flesh - Livy 23.5)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후세의 로마인들은 로마가 더 강해지도록 일조한 적으로서 한니발을 경외하기도 했고, 한니발 동상을 도심에 건립하기도 했다고 한다.
라틴어로는 <한니발이 문 앞에 있다(Hannibal erat ad portas)>,라는 말이 '위험이 임박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아이가 나쁜 짓을 하면 "한니발이 와서 너를 데려가 버린다"고 꾸짖을 때도 있다. 한편, 로마에 억압당한 국가에서는 한니발을 영웅으로 칭송할 때도 있다.

Friday, November 6, 2015

Trojan War 트로이 전쟁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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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Amours de Pâris et Hélène. Jacques Louis David

트로이 전쟁(Τρωικός πόλεμος, 영어 Trojan War)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의 영웅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의 토대다.
제우스는 너무 늘어난 인구를 줄이고자 테미스와 상의해서 인간 대부분을 죽이자고 결정한다.


 Les Noces de Thetis et de Pelée, Hendrick de Clerck

티탄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의 결혼식이 있었다. 신들은 빠짐없이 초대됐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 초대받지 못했고, 그녀는 화가 나서 헤스페리데스(Hesperis: 불멸의 정원)에 황금 사과를 갖다 놓았다. 황금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혀있었다. 그래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각자 자신이 황금 사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며 제우스에게 판단을 맡긴다. 제우스는 아름다운 사람은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 알아볼 것이라며, 인간 중 가장 아름다운 남자에게 판결을 맡기자고 한다. 그렇게 해서 심판을 보게 된 사람이 파리스다.

The Judgement of Paris, Peter Paul Rubens. c.1606

Claude Lorrain (1600 - 1682), The Judgment of Paris, 1645-1646

파리스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헤카베 사이에서 태어났다. 맏형은 헥토르, 누이는 카산드라다. 헤카베는 파리스를 임신했을 때 자신이 불타는 나무를 낳아, 그것이 번져 트로이가 불타는 꿈을 꿨다. 헤카베가 해몽가에게 꿈을 말하자 그는 "그 아이는 재앙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프리아모스는 알렉산드로스를 이데 산에 버린다. 버려진 아이는 아겔라오스라는 목자에게 거둬진다. 파리스는 아버지로 알고 있던 아겔라오스의 가축을 잘 지켜내고, 보호자라는 뜻의 알렉산드로스라는 별명을 얻는다.

어느 날 프리아모스 왕의 부하들이 그에게서 가장 멋진 황소 한 마리를 징발해 갔다. 어려서 죽은 왕자를 기리는 경기에서 우승자의 상품으로 쓰기 위해서다. 파리스가 그 경기에서 우승했다. 누나인 카산드라가 남동생을 알아봤고, 프리아모스와 헤카베도 버린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세 여신은 파리스 앞에 섰다. 그리고 각자 자신을 선택할 경우의 조건을 건다.

헤라는 세계의 패권, 아테나는 지혜와 무용, 아프로디테는 자신만큼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프로디테의 말을 듣는 순간 파리스는 앞선 두 여신의 말을 잊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주고, 아프로디테가 약속으로 준 여자가 미녀 헬레네다. 가장 아름다운 남녀가 이어진 것이다.

Charles Meynier, Helen and Paris, 19th century

그러나 헬레네는 이미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와 결혼한 몸이었다. 파리스의 동생 트카산드라만이 이 사건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아폴론의 저주로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메넬라오스는 형이자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로 가서 헬레네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파리스가 거절해서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위한 원정군을 모은다.

트로이 전쟁에는 신들도 편을 들었는데 진영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 진영 :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 헤파이스토스, 테티스
트로이 진영 : 아프로디테, 아레스, 아폴론, 아르테미스, 헤르메스

그리스 군대는 2년에 걸친 준비를 끝내고 보이오티아에 있는 아우리스에 모인다. 아카이아(Achaea: 그리스 서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에 있는 주) 군대는 아가멤논이 총대장이였으며, 총 100,000명에 함대는 1168척이였다. 아카이아 원정군은 트로이 가까운 바닷가에 도착해 트로이군을 격퇴하고서 바닷가에 진을 쳤다. 트로이군은 견고한 성벽이 있는 도시에서 농성하고, 양쪽은 바다와 도시 중간에 있는 스카만데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일리아스에서는 큰 희생을 낸 트로이 전쟁은 장장 10년에 걸쳐 치러졌다고 한다.

Achille dépose le cadavre d'Hector aux pieds du corps de Patrocle. Joseph Benoît Suvée


트로이 전쟁이 10년째에 접어들고, 아폴론은 그리스군에 역병을 뿌린다. 그리스군이 아폴론 신전의 사제의 딸을 유괴했는데 아가멤논이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의 활약으로 그리스군이 고전하자,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싸우다 헥토르에게 죽는다. 아킬레우스는 분노하며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준 갑옷을 입고 나간다. 싸우기 전 헥토르가 말한다.
"상대를 존중해서 누가 승리하든 시신을 보내주자"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헥토르에게 창을 던졌다. 하지만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투창을 피하고 말한다.
"내가 설령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네가 내 등을 찌르는 일은 없다!"
자신은 이 싸움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싸움에 끼여든 아테나가 몰래 아킬레우스에게 창을 돌려준다. 헥토르는 창을 던지지만 빗나가서 옆에 있던 데이포보스에게 다음 창을 달라고 하지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왜냐면 그 자리에 있던 데이포보스는 아테나가 변신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긴 창으로 헥토르의 목을 뚫는다. 헥토르는 유언으로 시신을 모독하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이것을 거부한다. 헥토르는 유언을 남긴다.
"I know you truly now, and see your fate, nor was it mine to sway you. The heart in your breast is iron indeed. But think, lest the gods, remembering me, turn their wrath on you, that day by the Scaean Gate when, brave as you are, Paris kills you, with Apollo’s help."
"난 이제 진정한 너를 알겠다. 그리고 네 운명도 보인다, 너를 쓰러뜨릴 자는 내가 아니었다는 것. 네 가슴 속 마음은 진정 강철, 그 자체다. 하지만 나를 기억하는 신들이 너에게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아무리 용맹해도 그 날, 스카에안 성문에서 아폴론의 도움을 받은 파리스가 너를 죽일 것이다.​"
헥토르가 어떻게 아킬레우스의 운명을 죽음 직전에 본 것인지는 모른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12일간 전차로 끌고 다닌다. 하지만 헤르메스가 인도해서 아킬레우스에게 온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손등에 키스하며 탄원하고, 마음이 약해진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용서를 빌고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준다.
아킬레우스는 이후에도 아마존 여왕​ 펜테실레이아, 에오스의 아들이자 에티오피아의 왕 멤논을 죽이는 등 활약하지만 헥토르의 예언이 실현된다.

Laocoön and His Sons, Laocoön Group. Athanadoros of Rhodes

Destruction of Troy (1634). Francisco Collantes

The fall of Troy. Kerstiaen De Keuninck

트로이 용장 헥토르와 아카이아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죽자 전쟁은 교착 상태가 됐다. 이 때 오디세우스가 거대한 목마를 건설하고 그 내부에 군사를 잠복시키는 전략을 고안했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군을 위장퇴각시킨 다음, 오디세우스의 사촌 시논을 필두로 한 남은 병사들을 통해서 이 목마를 트로이 안으로 옮기면 트로이인들은 승리하게 된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목마를 옮기지 못하도록 엄청 크게 만들었다는 가짜 정보를 전달한다.

아폴론의 신관 라오콘과 카산드라가 이것을 간파했지만, 라오콘은 포세이돈이 보낸 뱀에게 아들들과 교살된다. 라오콘의 죽음이 트로이의 목마를 들이지 않는 트로이에 대한 신의 분노라고 생각한 트로이군은 성벽을 무너뜨려서 목마를 성 안에 들인다.

목마 안에는 그리스군 40명이 들어있었다. 결국 안에서 나온 오디세우스 병사들이 트로이 성문을 열어 그리스군을 입성시키고 트로이는 멸망했다.


그런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는 트로이의 목마가 등장하지 않고(오디세이아에서도 음유시인의 노래등으로만 잠깐 등장) 오히려 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인 아이네이아드에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본래의 서사시환에서는 "소 일리아스"와 "일리오스 낙성"에서 트로이의 목마가 다뤄졌을 것이다.

트로이의 목마가 사실 지진이었다는 설도 있고(이유는 말은 포세이돈을 연상시키는 동물이며, 포세이돈은 지진을 일으키는 신이므로), 그리스인들이 함선을 '바다의 말'이라고도 부른 데서 새로운 배를 타고 온 그리스의 원군이라는 설도 있고, 아시리아인들이 적국의 성을 침공하는 그림에 목마와 흡사한 구조물이 그려져 있어서 공성탑이나 충차의 일종이라는 설도 있다.

고대 그리스 전쟁사 권위자인 배리 스트라우스 교수는 목마 자체는 실제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고, 리스인들이 트로이를 침공한데 대해 트로이의 신들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바치는 조각상이었을 거라고 했다. 트로이인들이 목마를 보고 정말로 그리스인들이 물러간 것으로 생각하고 경계 태세가 느슨해진 것을 틈타, 인근 주민으로 위장한 그리스 특공대가 승전 축제에 참석한다는 핑계로 성내에 들어갔다가 밤에 성문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그리스군을 불러왔을 거라는 것.
Paysage avec Pâris et Oenone dit Le Gué. Claude Gellée 

아킬레우스가 죽은 후 오디세우스와 그리스군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헤라클레스의 활이 있어야 한다"라는 신탁을 듣고 필록테테스를 데리고 온다. 파리스는 필록테테스의 활에 맞는데, 그 활에는 헤라클레스가 죽인 히드라의 독이 묻어 있었다. 생명이 위독해진 파리스는 전처 오이오네를 떠올린다. 오이오네는 의술의 신의 가르침을 받아 히드라의 독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버림 받았던 그녀는 파리스를 냉대한다. 결국 파리스는 죽고, 오이오네는 마음이 변해 그를 치료하러 갔지만 이미 파리스의 죽음을 알고 자살한다.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Agamemnon)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은 아카이아 원정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카이아군의 지휘관들도 비극적인 말로를 맞이했다. 소 아이아스는 아테나의 신전에서 카산드라를 강간해서 아테나의 노여움으로 배가 침몰해 죽는다. 메넬라오스는 귀국 도중 폭풍을 만나, 이집트에 표류해서 8년에 걸쳐 겨우 돌아간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귀향 후 아내와 애인에게 암살당했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10년간 표류했다.
그렇다면 헬레네는 어떻게 됐을까?그녀는 트로이가 멸망하자 메넬라오스와 스파르타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Pausanias)의 Description of Greece의 기록에 의하면 메넬라오스가 죽자, 헬레네는 스파르타에서 추방돼서 로데스의 여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남편을 트로이 전쟁에서 잃은 로데스의 여왕은 헬레네에게 원한을 품었고, 시녀들을 시켜 목욕중이었던 헬레네를 잡아 나무에 매달아 살해했다고 한다.




Wednesday, November 4, 2015

zeus greek god 신들의 왕 제우스와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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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ΖΕΥΣ , Ζεύς, Zeus)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주신. 우주와 날씨를 다스리고 인류와 신들의 질서를 지키는 번개의 신이다. 이 번개는 퀴클롭스(Kyklops,Cyclops)가 만들었다.

로마어로는 유피테르, 영어로 주피터. 게르만 신화의 티와즈, 북유럽 신화의 티르, 라틴어로 신을 가리키는 보통명사 deus, 범어에서 신들의 한 무리를 가리키는 deva(데바) 등은 언어학적으로 원시인구어(Proto Indo-European language)에서 신을 가리키던 dhyeus에서 갈라진 것으로 보인다.

티탄족인 크로노스와 레아의 막내아들로 포세이돈과 하데스의 남동생. 부인은 자매인 헤라지만, 레토와 누이인 데메테르 등 여신은 물론이고 님프, 인간과도 교제해서 자녀를 많이 낳았다.
제우스는 이집트 신화의 최고신 아문과 동일시된다. 이집트 서부 사막의 오아시스에 있는 아문 신전에는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가 방문해 신탁을 들었다고 한다.
동방 원정 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도 아문 신전을 방문해서 아문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것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것을 상징해서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고 만족했다.

제우스의 연인들

제우스의 연인은 무수히 많았지만 유명한 이들만 소개한다.

1. 메티스(Metis)
제우스의 첫번째 아내. 지혜의 여신. 오케아니데스(Oceanids, 그리스어: Ὠκεανίς , 단수형 : Ὠκεανίδαι)며, 티탄이지만 티타노 마키아에서는 제우스 편에서 싸웠다. 가이아는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남신은 아버지를 능가"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이것을 두려워한 제우스는 임신한 메티스를 삼켰다. "어떤 것이든 변신 할 수 있다면 물로 변신해 봐라"는 제우스의 도발에 메티스가 물로 변하자 마셔버렸다는 말도 있다. 메티스는 제우스 안에서 태어날 아이를 위해 갑옷을 만든다. 제우스는 메티스를 삼켜서 지혜까지도 갖게 됐다.
제우스는 두통을 느끼고 헤파이스토스에게 머리를 조금 갈라보게 한다. 그러자 무장한 여신이 함성을 지르며 제우스의 머리에서 튀어나왔다. 이 여신이 아테나다.

2. 테미스(Themis) & 헤라(Hera)
제우스의 2번째 여자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이자 법의 여신인 테미스다. 하지만 테미스와 결혼하고서도 결혼과 가정을 수호하는 질투의 여신 헤라에게 반해 구애했지만 헤라는 맹렬하게 저항했다. 제우스는 다친 새로 변신해서 헤라를 범하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헤라는 교제 조건으로 결혼을 제시해서, 제우스는 테미스와 이혼하고 헤라와 결혼한다.

3. 이오(Io)
제우스는 강의 신 이나코스와 멜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자, 아르고스를 건설한 포로네우스의 자매 이오에게 구름으로 변신해서 접근한다. 제우스는 이오를 암소로 바꾸어 헤라의 눈을 속이고자 했지만 헤라는 제우스에게 암소를 받고 백개의 눈을 가진 거인 아르고스가 감시하게 했다.
아르고스는 자고 있을 때도 50개의 눈을 뜨고 있어서 사각이 없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명령으로 풀피리로 아르고스를 재워 모든 눈을 감게 해서, 그 목을 칼로 잘랐다. 헤라는 아르고스를 불쌍하게 여겨 공작으로 환생시키고, 이 공작은 헤라의 상징이 된다.
헤라는 이오에게 등애를 보내고, 이오는 이집트로 가서까지 등애에게 시달린다. 괴로워하는 이오를 보고 안쓰러워하던 제우스는, 헤라에게 용서를 구하고 이오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린다. 이오는 에파포스(Epaphos)를 낳는다.

Pieter Pauwel(Peter Paul) Rubens(1577-1640)

Jupiter and Io(Correggio)

 John Hoppner

Juno discovering Jupiter with Io(Pieter Lastman 1583-1633)

 Juno and Argus - Peter Paul Rubens.

Juno Receiving the Head of Argos

4. 레다(Leda)
아이토리아 왕 테스티오스의 딸이다. 스파르타 왕인 틴다레오스의 아내였지만, 제우스는 백조로 변신해서 레다에게 접근한다. 레다는 알 2개를 낳았는데 알 하나에서는 절세 미녀가 되는 헬레네와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또 하나의 알에서는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가 태어난다. 제우스는 헬레네의 탄생을 기념하고자 하늘에 백조자리를 만든다.

 Leda and the Swan (Cesare da Sesto)

Leon Reisener Leda and the Swan

5. 에우로페(Europe, Europa)
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와 텔레파사의 딸이다. 제우스는 흰 황소로 변신했다. 시녀와 꽃을 따다가 흰 황소를 발견한 에우로피는 흰 황소 위에 탄다. 그 순간 흰 황소는 에우로페를 태우고 그대로 납치했다. 흰 황소가 에우로페와 함께 이동한 지역을 Europa이라고 부르게 됐다. 크레타 섬에 도착한 제우스는 본래 모습을 드러내고 에우로페는 크레타의 왕비가 된다. 그리고 미노스와 라다만티스, 사르페돈이 태어난다. 그 후, 아스테리오스가 세 아들의 의부가 됐다. 제우스는 그녀에게 크레타 섬에 이방인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청동 인간 탈로스, 반드시 노획물을 잡는 사냥개, 과녁을 빗나가지 않는 창을 선물로 줬다. 그 후 제우스는 다시 하얀 황소로 모습을 바꾸고 밤하늘로 올라가 황소자리가 됐다.

Europe surprise par Zeus transformé en Taureau, peinture de F.Boucher
6. 다나에(Danae)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 아크리시오스는 외손자에게 죽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다나에를 지하에 있는 청동 방에 가두지만, 제우스가 황금 빗물로 변신해서 그녀에게 접근해서 페르세우스가 태어났다. 아크리오스는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들은 세리포스 섬에 다다라 섬의 왕 폴리데크테스의 동생인 디크티스에게 구조된다. 훗날 경기에서 아크리시오스는 페르세우스가 던진 원반에 맞아 죽는다.

Danaë
7. 알크메네(Alcmene)
미케네의 왕 엘렉트리온과 아낙소의 딸, 그리고 암피트리온의 아내. 암피트리온이 실수로 엘렉트리온을 죽이고 추방되자 테베로 함께 갔다. 그리고 청혼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타포스인에게 죽은 형제들의 보복을 요청했다. 암피트리온은 테베의 왕 크레온의 지원병과 함께 원정을 떠나는데, 이것은 제우스가 꾸민 일이라고 한다. 기간테스와의 싸움을 위해 알크메네를 통해 영웅을 낳으려 했다는 것이다.
제우스는 암피트리온으로 변신해서 훌륭한 영웅을 낳기 위해 밤의 길이를 3배 늘려 알크메네와 성교한다. 타포스 섬을 정복한 암피트리온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진상을 듣고 알크메네를 죽이려고 하지만, 제우스가 방해한다. 암피트리온이 미니아와의 싸움에서 죽자 크레타 섬의 라다만티스와 결혼해서, 보이오티아에서 살았다.
Zeus visiting Alcmene disguised as Amphitryon
8. 가니메데스(Ganymedes)
제우스는 가니메데스라는 트로이의 미소년도 사랑해 올림포스로 납치해 사환으로 삼았다. 올림포스의 신들의 사환은 원래 청춘의 여신인 헤베의 역할이었다. 제우스의 아들인 영웅 헤라클레스가 죽어 신이 되자, 헤라클레스를 미워했던 헤라도 결국 헤라클레스와 화해하고 그 딸 헤베가 아내로 헤라클레스에 주어졌다. 이 때문에 신들의 연회에 사환이 없어졌다. 제우스는 인간들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가니메데스를 선택해 독수리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를 데려와, 올림포스의 사환으로 삼았다.
가니메디스는 트로이 왕가의 조상인 트로스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라오메돈 또는 프리아모스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인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었고, 가니메데스에게는 영원한 젊음과 불멸이 주어졌다. 또한 대가로 그 아버지에게는, 헤르메스에게 시켜 신마 2마리와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황금 포도 나무를 줬다.
가니메데스의 라틴식 이름은 ‘카타미투스(Catamitus)’인데, 동성애 상대의 소년을 가리키는 ‘캐터마이트(catamite)’는 여기서 파생된 말이다. 17~18세기의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가니메데스가 동성애의 여성 역할을 하는 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고도 한다. ​또 가니메데스는 목성의 위성 이름이기도 한데,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을 가리키는 주피터는 로마신화에서 제우스에 해당하는 유피테르의 영어식 이름이다.
천상에 빛나는 물병자리는 신들에게 넥타르를 서빙하는 가니메데스의 모습이며, 독수리자리는 제우스가 그를 납치할 때 변신한 독수리의 모습이다.

Ganymede Waters Zeus as an Eagle by Bertel Thorvaldsen (Minneapolis Institute of Arts, Minneapolis, MN)

De Ontvoering van Ganymedes door Peter Paul Rubens. Het kunstwerk is geschilderd in 1611. De originele grootte van dit schilderij is ca. 200 x 200 cm

 Ganymedes. Gabriel Joseph Marie Augustin Ferrier (1847 - 1914) 

Ganymedes. ranskalainen Gustave Moreau (1826 - 1898)